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궁금증을 넘어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야?', '저렇게 악한 사람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잖아!' '불법을 하는데도 회사가 저렇게 잘되는 거 봐! 이상하잖아?'
이런 세상인데도,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살아가면서 이런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치 운전사가 없는 자동차가 질주를 하는 것처럼, 세상만사가 아찔하고 이상하게 돌아가서 속상하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홧김에 쉽사리 결론을 내린다.
'이런 걸 보면 역시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게 맞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지.'
그런데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전에 잠시 멈춰 보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죄 없는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죽어갔다. 그때 유대인들이 눈물을 뿌리며 던진 질문이 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허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용소 내부를 조사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한쪽 벽에 쓰여 있는 찬송가 가사 때문이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이런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니!
그런데 또 다른 곳에도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이런 불합리하고 처참한 현실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니! 그럼에도 이게 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하며 살았던 것이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하신 거야!'라고 고백하는 건 어렵지 않다. 행복한 부부로 아름다운 가정을 누리고 있는 부부가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천생연분이야!'라고 하는 거야 당연하다. 우리 자녀들이 진학을 잘 하고, 취업을 잘 해서 기분이 좋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라고 말하는 거야 지당하다. 어려운 시대임에도 여전히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야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그런데 문제가 꼬일 때,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심각한 질병으로 오늘내일할 때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고백한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시 47:2)."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어떠하든지,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닥쳐오든지,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는 흔들림 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주님은 때때로 고속도로로 운전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기도 하시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리기도 하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그분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어도, 우리 눈에는 이상해 보여도,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어도,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날마다 만나는 일들은 슬픈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성을 아름답게 완성하시는 데 필요한 재료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만들어 가시는 선에 대한 기대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한나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나게 간증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만약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하며 산다면 당당하지 않겠는가? 모든 삶의 형편에 감사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하며 살았던 요셉은 어땠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을 생각하면, 불륜을 즐기자고 끈질기게 유혹하다 거부당하자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보디발의 아내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억울한 상황에서도 불평하지도,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억울한 일을 다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계셨다.
다윗은 사울의 충신이자 사위로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러나 돌아온 건 협박과 살해 모의였다. 그런데 엔게디 황무지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기에 자기 맘대로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하기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겼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이 땅에서는 주님의 통치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그 나라가 다가올 것이다. 죄가 없는 곳, 악한 세력들이 사라진 세계가 오면 완전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와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동시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 고백하며,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기로 결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