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은 향후 한국 교회의 신학과 교회 형성에 지대한 결과를 남겨 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 결과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 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했다. 기독교 진리가 한국 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여러 가지 동기로 받아들였으나 참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을 통해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령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결단하는 삶, 즉 전형적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됐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은 유지하면서도 그대로 방치했던 사당(祠堂 devil house)을 이 부흥운동 후 헐어 버리는 사례가 빈번했던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한 선교사는 부흥운동이 가져온 한국인들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 신앙 체험의 결과로……신자들 가운데 의와 죄의 의식이 심화됐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교훈은 한인들에게는 생소했었다. 한인들에게도 죄와 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 부흥은 교인들 마음에 죄의 극심한 죄악성을 깨닫게 해 준 동시에 의에 살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평생 책임이란 인식을 깊이 넣어 주었다.
특히 이때 많은 회개 항목 중, 지금까지 유교적 관념으로 전혀 죄로 여기지 않았던 축첩, 노비소유, 조혼, 음주, 흡연, 아편복용, 아동구타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했다. 이에 따라 첩과 소실을 정리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른 행위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한국 교회 형질(形質)의 정착은 앞으로 이 교회가 민족교회로서의 갈 길을 찾았다는 의미다. 1910년 에딘버러(Edinburgh) 국제선교협의회에서 한국의 대부흥에 대해, “신생 한국 교회에 독자적 성신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한 것 같이 한국의 독자적 교회 역사가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다. 어느 부흥운동이든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교회 성장이다. 1907년 전국 교회에 부흥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필연적 결과 중 하나는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 부흥이었다. 교회 성장에 대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통계 자료를 제시하였다.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장로교회의 성장은 세례자 수가 12,506명에서 15,097명으로 29%가, 원입은 44,587명에서 59,787명으로 15,200명이 늘어 34%가 증가했다. 따라서 1906년의 교인 수 54,987명에서 1907년에는 73,844명으로 증가하여 34%가 증가한 셈이다. 감리교회도 역시 그 수가 증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906년에 18,107명의 교인이 1907년에는 39,613명으로 무려 118%의 증가를 나타냈다.
또한 부흥운동은 기독교 학교 증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06년 6월 현재 208개의 학교가 이듬해 같은 달에는 344개로 늘어나 무려 130개 이상 학교가 증가됐다. 자연히 학생들도 늘어나 1906년에 3,456명이었던 학생 수가 이듬해에는 7,504명으로 늘어났다. 기독교 학교 학생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항일운동의 선두 주자가 될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됐을 때 기미 3·1 독립운동이 촉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셋째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 교회의 특징이 확립됐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라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기도회가 정착됐다. 새벽기도회는 세계 그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 특유의 기도회 모습이다. 이 기도회에서 목회자들과 일반 교인들이 영적 힘을 얻고,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소원을 아뢰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귀한 기도의 시간이다. 평양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이래 전국 각지 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실시됐다. 평북 강계의 한 교인은 개종하고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여 지금까지 16년간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가장 셰샹에 드물고 모범할 만한 일은 주문언(朱文彦)씨라는 로인이 16년 전 본 곳 교회 설립시로부터 례배당에 와셔는 새벽 긔도를 오날까지 계쇽한다더라.” 이 새벽기도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에 계속돼 오면서 교회의 성장과 영적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는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 일은 목격자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시작됐다. “……간단한 설교가 끝나고 그레이엄 리(Graham Lee) 선교사가 사회하면서 회중에게 기도하자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시작했다. 그가 ‘여러분이 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니 온 회중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정황은 실로 글로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런 혼란도 없었고 도리어 심령과 심령이 호응하는 화음이 서리었다. 기도를 올리고 싶은 충격을 저항할 수 없던 마음과 마음이 사귀는 심교(心交)였다. 기도 소리는 마치 폭포수 소리와 같아서 기도의 대해조(大海潮)가 하나님의 보좌로 밀려 올라가는 듯하였다.”
부흥운동은 이렇게 통성기도라는 한국 특유의 기도 방법이 도입돼는 계기가 됐다. 이 기도는 새벽기도와 더불어 부흥운동의 결과로 남아 오늘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주요 기도 방식 중 하나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철야기도가 시작됐다. 저녁집회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멀리서 온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철야하면서 기도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함으로 자연히 철야기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가 시작돼는 계기가 됐다. 이 기간 동안 평양을 방문했던 영국 성서공회 본부 총무 릿슨(J.H.Ritson)은 “사람들이 밤새 교회에서 기도하며 머물러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런 한국교회의 특징적 모습들 때문에 “기독교가 더 이상 서양 종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