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2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는 북조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자이지만 네 명의 남조 유다의 왕들을 들어 그의 예언 시기를 설명한 것은 선지자들 사이에 유다를 중시하는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선지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 노릇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가 음란한 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고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실증하도록 호세아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3절,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고멜은 음탕한 여자로서 첫째 아들을 낳고, 둘째 딸을 낳고, 셋째 아들을 낳는다.
4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첫째 아들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다. 그런데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흩으심’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여 반대의 뜻을 표현하는 말재롱(paronomasia)을 좋아했다. 뜻은 완전히 다른데 음은 비슷하게 짓는 문화적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에 하나님께서 예후가 왕이 되도록 하신 것은 부정한 왕을 처리하고 심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았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왕권을 사용해서 악한 일을 많이 했다. 그렇게 예후의 손에 죽은 많은 왕들을 ‘이스르엘’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또한 첫째 아들을 이스르엘로 이름 지은 것은 당시의 예후 왕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게 한 것(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첫 아들을 이렇게 ‘이스르엘’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징벌을 받을 것의 표적이었다.
5절,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심판의 내용이다. 장래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6절,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이때에 하나님은 극심한 범죄를 행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지 않고 용서치 않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하셨다. ‘루하마’는 긍휼히 여긴다는 뜻인데 ‘로’를 붙이면 반대의 뜻이 되어서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7절,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그런데 ‘내가 유다는 구원하겠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당시 유다는 이스라엘보다는 좀 나았던 것 같다. 이렇게 호세아 선지자는 가끔 유다에 대해서 언급할 뿐 그가 주로 예언한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했고 유다는 조금 더 있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했다. 그때 호세아 선지자가 유다는 망하게 하지 않고 긍휼히 여겨 구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또한 말과 마병을 사용하는 전쟁으로 구원하지 않고 여호와로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
8-9절,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로암미’라는 아들을 낳을 때 이스라엘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10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로마서 9장 25-26절에 인용된 말씀이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일반적으로 읽고 지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보통으로 읽고 지나갈 말씀이 아니다. 이때 이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절되는 동시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로마서 9장을 보자.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5-27절). 24절에서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고 했다.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이미 로암미,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고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백성이라’고 하신 것처럼 이방인들을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놀라운 예언을 했으며, 바울은 이 구절을 로마서에서 인용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주님 오시기 칠팔백 년 전에 이렇게 놀라운 예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이미 이방인을 통한 교회 설립이 예언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11절,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방금 로암미라고 하면서 그들을 버린다고 했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버렸었는데 바로 이어서 부흥과 회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일단 택하시면 잠시 버리신 것 같을지라도 반드시 회복하신다.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엄중한 말씀을 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한 두목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앗수르로 포로 되어 간 후에 스룹바벨을 두목으로 세워 다시 돌아오는데, 실제로 그는 메시아이다. 메시아 왕국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로 생각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다시 회복된다는 예언이다. 이것이 구약 예언의 큰 본질이다.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칼빈은 이곳이 아합과 기타 사람들이 살륙을 당한 땅인데 이렇게 많이 살육을 당했어도 이제는 백성이 각처에서 돌아오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아무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장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버림받을 것을 말씀하셨으나 그분의 언약에 따라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시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가 중복되어 있다.
이름 ‘이스르엘’도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다. 아들 이름도 ‘이스르엘’이라 하고 예후의 대적도 ‘이스르엘’이라고 하며 ‘이스르엘’이라는 전쟁터도 있다. 아합과 기타 사람들이 이스르엘에서 살육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르엘이라는 말을 여러 용법으로 쓰셨다. 성경 한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처럼 여러 가지 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의 흩으심’이라는 뜻도 되지만 또 ‘하나님의 심으심’이라는 뜻도 있다. 앞에서는 이스르엘이 소극적으로 표현되었지만 11절에서는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