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한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비극적 역사를 맞는다. 1905년 7월 27일 미 육군성 장관 태프트(W. H. Taft)와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郞 가쓰라 다로)와의 사이에 소위 ‘가쓰라-태프트 메모’라는 비밀협정이 조인됐다. 이 협정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략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내용이다.
이에 따라 그 해 11월 일제는 저 치욕의 을사늑약(乙已勒約)을 강압적으로 선포하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했다. 1907년에는 정미(丁未)조약을 역시 강제해 한국 군대와 경찰을 해산해 사실상 국권을 장악했다. 또한 '해아(海牙:Hague) 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켜 왕권까지 좌지우지하면서 급기야 1910년 한일병탄을 이루고 말았으니, 500년 조선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한국 침탈 역사는 저들이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패퇴하여 이 강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서운 박해와 착취로 점철됐다. 고난 세월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성장해 1907년에 독(립)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창립됐으며, 감리교회도 연회를 조직하고 선교와 교육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리게 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전기가 된다. 그 때까지 이기적 동기나 애국적 동기에 의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 부흥운동을 통해 비로소 기독교 진리를 접하고 참 기독자로 거듭나는 체험을 한다. 따라서 이 부흥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의 교회가 토착교회로 자리잡음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이 운동의 발원은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먼저 원인을 살펴보면, 19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남도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회를 가졌다. 이 기도회는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와 일부 한국교인도 참여하는 연합기도회로 확대되어 매일 밤 집회가 일주간 계속됐다. 그런데 이 기도회에 남감리교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강원도에서 수년 선교활동을 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하디(R. A. Hardie)가 자기의 무력을 깨닫고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 부홍운동의 불씨가 됐다.
하디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YMCA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일하다 1898년에 남감리교회에 가담, 강원도에서 사역했다. 그의 개척선교는 별 진척이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남감리)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地境垈) 지역에서 애써 일했으나, 사업에 실패했다. 이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할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그는 선교사들 앞에서 솔직히 자기의 실패와 그 원인을 고백했으며, 기도 중 성령이 자기에게 임재 해 오심을 깨닫게 됐다. 그때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 체험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 체험을 통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붙었다.
이런 사경회가 이듬해인 1904년에도 원산에서 다시 시작되자. 성령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런 은사 체험은 원산을 중심한 일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넓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산 지방 부흥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1906년 여름, 하디를 강사로 초빙하여 장•감 선교사 연합으로 일주간 기도회로 모여 성령체험을 시도했다. 그 기도회 후에 북장로교회 연차총회가 서울에서 모였는데 이때 뉴욕의 존슨(H. A. Johnson) 목사가 한국 방문 중에 인도와 웨일즈(Wales) 지방에 일고 있는 부흥의 소식을 전했다.
1907년 부흥운동의 직접 동기는 1907년 정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안남도 남자도사경회(男子都査經會)에서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 비롯됐다. 이 사경회는 정월 6일부터 시작되어 열흘 동안 계속됐는데, 주로 성경공부를 했고, 저녁에는 전도 집회로 모였다. 그런데 부흥의 불길이 붙게 된 동기 중 하나는 이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계속한 일이다.
그 전해 가을부터 시작된 새벽기도회는 길선주 장로가 인도했다. 길 장로는 동료 장로 박치록과 함께 국가의 어려움을 염려하며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했다. 이에 여러 교인이 호응하여 함께 기도했는데, 300∼500명 교인이 모이기 시작했다. 길 장로는 교회의 공식 허가 없이 매일 수백의 교인이 모이는 것이 덕이 되지 않는다 판단하고, 당회에 정식 허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교회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됐다.
이렇게 새벽기도회로 준비된 사경회는 몇 날이 못 돼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는데 그 때가 14일 저녁 집회였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읽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들이라”고 설교한 후,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교회 안에 신비한 험이 넘쳐흐름을 느꼈고,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재함을 피부로 느꼈다.
이 날 밤에 일어났던 현상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신문 「더 타임스」(The Times)가 영국의 세실(Sir William Cecil) 경이 직접 목도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했다.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애절한 침통(沈痛)에 사로잡혔다. 각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자기생활에 정죄 판결을 선언하여 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 때 선교사들은 사람들의 엄청난 죄의 고백을 듣고 놀랐고, 또 이러한 기사를 생기게 한 능력이 강림함을 보고 떨었다. 그들이 평소에 사랑하던 한국인 제자들의 참회의 고통에 동정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음 날 선교사들은 이 사태가 지나가고 거룩한 위로의 교훈으로 지난밤의 상처를 싸매게 되기를 희망했으나 또다시 이와 동일한 통회와, 죄의 자백이 되풀이됐으며, 이러한 사태는 여러 날 더 계속됐다.”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