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 조웅래 집사님이 소천하신 지금은
슬퍼할 때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부활과 영생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슬퍼할 때입니다.
언젠가는 이 슬픔을 극복하고 함께 위로하면서 고 조웅래 집사님을 만날 설레임으로 기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할 때입니다.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위해 정말 열심히 헌신한 우리 남편을 왜 데려가셨습니까? 제가 남편에게 정말 좋은 아내가 되려고 했는데 왜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하는 말을 할 때입니다. 41살의 젊은 남편을 잃은 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짧지만 정말 행복했습니다. 저에게 과분한 남편을 11년 간이나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정말 지극하고 진실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하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욥의 아내처럼 원망의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때입니다.

지금은 절망 가운데서 멍한 느낌을 가질 때입니다. 앞으로 자식과 무엇을 먹고 사나,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사나, 내가 앞으로 살 힘이 있을까, 내 건강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절망 가운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래도 내가 자식을 키우고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킬 수 있었구나 하는 고백을 할 것입니다. 수많은 불면의 밤이 지나야 "현덕 아빠, 우리 현덕이 자랑스러운 모습 보세요. 이제는 의젓한 어른이 되었네요! 하나님이 도와주셨어요"하고 고백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며느리를 데리고 무덤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망과 멍한 느낌이 가시지 않을 때입니다.

지금은 목사님도 성도님들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서운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누가 무엇을 해도
죽은 남편과 죽은 아빠가 살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고, 뜻없이 한
행동에도 가슴에 멍이 들 때입니다. 몇 달, 몇 년이 지나야 그 때 수많은 성도들이 찾아와 준 것이 고맙게 느껴지고, 한 참이 지나야, 많은 분들이 기도하면서 옆에 격려가 되어준 것이 기억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과 장례를 치루도록 도와준 일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그 때 그 많은 분들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위기를 지냈을까 하는 고백이 나오고, 나도 앞으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지금은 서운하게 생각될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사람들이라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찬양하고 감사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중에,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에, 새로운 희망의 영이 우리를 세워줄 때,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의 격려가 쌓인 후에 그 때 우리들은 다시 살 힘을 가지고, 다시 찬양을 할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감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슬퍼하는 우리와 함께 우리 주님도 슬퍼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시면서 이 슬픔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사흘 뒤에 부활이 있을 것과 영원한 승리가 있을 것을 믿지만, 지금은 슬픔과 절망으로 외칠 때입니다. 이러한 슬픔을 우리 주님이 우리와 나누어 주신 이 사실에 우리 모두가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슬퍼할 주님이 계시고, 함께 슬퍼하는 성도들과 가족들이 있음으로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