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서거 70주기 기념 청어람 기획강좌가 '김교신, 한국 기독교가 가보지 않은 길'을 주제로 9일 오후 이화여대 대학교회 소예배실에서 개최됐다.
이번 기획강좌는 총 5강으로 구성됐으며, 9일을 시작으로 5월 7일까지 매주 목요일 이어진다. 이날은 1강 "김교신을 소개합니다: 그의 영성, 사상, 사람"을 제목으로 박찬규 대표(도서출판 익두스)가 강의했다.
청어람은 이번 기획강좌에 대해 "올해는 무교회주의자요, 민족주의자요, 청년의 스승이자, 노동자의 친구였던 김교신 선생의 70주기"라며 "그의 말과 행적은 생전에 그 주변에 모였던 무교회운동 동역자들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내보일 수 있는 진면목을 펼쳐 보임으로써 꾸준히 기억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족적은 교회사의 책장 일부를 스치듯 지나고 있을 뿐, 한국 기독교의 전망을 모색하는 젊은 세대와 광범위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며 "그의 탄생과 서거일이 있는 4월에 연속 강좌를 통해 새로운 접촉점을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날 강좌를 맡은 박찬규 대표는 먼저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 전한 뒤, 그의 신앙의 실천적 특성과 그를 통해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소개했다.
경주 김 씨의 엄격한 유교 가문에서 출생한 김교신은 20세 때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그 때 마쓰다라는 노방전도자를 통해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다니던 교회가 내분에 휩싸이고 담임목사가 반대파에 의해 쫓겨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6개월간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다. 이후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로 7년을 사사받고, 서구의 조직화되고 인간화된 기독교를 비판하며 성서대로의 개혁을 주창한 우치무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교신은 교사로 재직하며 일생 동안 『성서조선』을 발행하여 한국 기독교사에 한 획을 긋는다. 허위와 불의에 극히 단호했던 김교신은, 잡지를 통해 교권의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42년 일제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쓴 칼럼 '조와'를 문제 삼아 잡지의 독자들과 동인들을 모두 검거하였고, 이에 김교신을 비롯한 13인은 1년여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 김교신은 질소비료회사에서 일하며 5천여 조선 노무자들의 주택·복지·위생·교육 등을 위해 노력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난다.
박찬규 대표는 "김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난 것"이라며 "이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과 역사적으로 형성된 서구적 기독교를 분리해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서구식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김교신은,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소개하며 조선산 기독교와 전적 기독교를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가 학구적 기독교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당대 부흥운동과 성령운동을 경계했다. 또 "우리나라 기독교는 성경으로 교회에 대한 고민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며 각자에게 부여된 말씀에 대한 고민, 제자도, 자생적인 공동체 형성을 지향했다.
자신에게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또 극렬할 정도로 치열하게 일제 하를 살았던 김교신은, 주변인들에게 무수한 정신적 영향을 끼쳤고, 또 그 문하에서 배운 수많은 제자들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교류하였던 인물로는 『성서조선』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송두용을 비롯하여 다석 류영모, 남강 이승훈, 춘원 이광수 등이,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장기려, 원경선, 김진홍, 손기정, 류달영, 윤석중, 이창호, 민경배 등이 있다. 오산학교, 풀무학교, 거창고 등 교육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