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박문수 교수, 제1발표 박명수 교수와 논평 김명구 교수, 제2발표 허명섭 교수와 논평 이은선 교수. ⓒ이대웅 기자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박문수 교수, 제1발표 박명수 교수와 논평 김명구 교수, 제2발표 허명섭 교수와 논평 이은선 교수. ⓒ이대웅 기자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제19회 영익기념강좌 ‘해방 70주년과 한국 기독교’를 1일 오전 서울신대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개최했다.

이날 강좌에서는 ‘해방정국의 건국 논쟁: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를 박명수 교수가, ‘대한민국 건국과 종교: 종교세력의 건국운동을 중심으로’를 허명섭 교수(이상 서울신대)가 각각 발표했다. 논평은 김명구 교수(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와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각각 맡았다.

해방 후 한 달, 무슨 일이 있었나

박명수 교수는 지난해 영익기념강좌에 이어 해방 후 건국운동에 대해 살폈다. 그는 “8월 15일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등 두 중요한 세력이 있었고,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논쟁과 투쟁을 거쳤다”며 “이들이 각각 어떤 건국을 준비했고 이끄는 세력은 누구이며 이들의 건국운동이 오늘 대한민국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밝힘으로써,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해방과 건국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이 폄훼당하는 가운데 정확한 역사를 제시하려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관련 연구에 집중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일제 치하 한국사회는 민족의 독립에 모두 동의했지만, 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지는 아무런 합의가 없었고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며 “송진우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서구식 민주주의를 선호했고,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 우익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지만, 좌익들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고 했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총독부는 패전 후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조선 지도자들과 타협하고자 했고, 여운형은 여기에 응해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정권을 이양받아야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를 거절했고, 새 나라의 정권은 일본이 아니라 연합군, 구체적으로 미국에게서 받아야 하며 그 주체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인 임시정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에게서 어느 정도 인계받은 치안권을 중심으로 좌익 계열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했고, 석방된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위해 전투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분명한 목표는 ‘계급 없는 세상’이었고, 이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인민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당시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소문 때문에 소련과 가까운 여운형에게 치안을 맡기려 한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오히려 미군이 임시정부와 함께 진주한다는 소문이 나고, 일부에서 일본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생기면서, 조선총독부는 입장을 바꿨다. 또 각 지역마다 여론을 주도하는 ‘유지’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들이 치안과 식량 배급을 담당하기로 하면서 세력이 미미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8월 18일 박헌영이 오랜 지하투쟁을 끝내고 서울에 나타나 공산당 내부에서 파벌 싸움이 일어났고, ‘건준에 송진우를 영입해야 한다’는 건준 개편론이 민족주의자들과 총독부 등에 의해 강하게 제기되면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내부 급진파 때문에 영입은 실패했고, 급진파 공산주의(박헌영)와 사회주의(여운형), 원로 공산주의(정백·조동호)와 온건 민족주의(안재홍) 등이 연합해 만들어진 건준은 9월 4일 급진파들의 의도대로 박헌영과 여운형 계열만 남게 됐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해방정국에서 좌익세력이 매우 강했다는 주장이 많지만, 1주일 만에 지하로 숨어들고 회의도 열지 못할 정도로 약화됐다”며 “이는 역사가들이 그들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민족주의 진영은 더 풍성해졌다. 건준에서 추방된 안재홍과 원로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이 민족주의로 선회했던 것.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송진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여야 하고, 이를 위해 미국 등 연합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를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만들고,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요구로 좌우합작이 됐지만 주도권은 우익에게 있었고, 해방 후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좌익의 주장이 있었지만 오히려 좌측이던 김규식마저 우익을 지지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우익의 입장이 강화됐다. 그러나 건준은 임시정부를 반대했고,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일반적 정서와 거리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많은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결국 건준 측은 9월 4일 인민공화국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이틀 후인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여운형을 임시의장으로 하고 14일 조각까지 발표했지만, 이 때는 이미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난 후였다. 박 교수는 이러한 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서울 근교의 일부 노동자들만을 대표한 절차상 문제 △자본가나 지배층을 배제한 내용상 문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전국 각지의 유지를 제외한 구성상 문제 등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명수 교수는 “9월 8일 서울에 도착한 미군은 형식적으로는 미 군정 외에는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두 진영 중 임시정부를 선택했고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을 서두르게 하는 등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들려 했다”며 “여기서 기독교의 역할을 찾는다면, 임시정부의 중심이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점과 함께 기독교는 미국과 한국 사회를 연결할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는 점을 꼽고 싶다”고 정리했다.

6대 종단은 건국운동에 어떻게 참여했나

허명섭 교수는 해방 후 각 종교별 건국운동을 정리했다. 그는 “해방 후 한국의 각 종교들은 범주와 방식,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건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다양한 세력들과 조우하며 각자의 노선을 취했다”며 “물론 각 종교 내의 노선 차이도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노선 선택에 따라 결과도 달라졌고, 이는 건국 후 각 종교의 부침을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패러다임”이라고 전제했다.

허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에는 한국의 종교계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는 초대 정부 첫 각료들 21명 중 약 71%인 15명이 종교인들로 구성된 사실로 알 수 있다”며 “1945년 12월 20일 기독교·대종교·천주교·불교·유교·천도교 등 6대 종교가 참여해 결성한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 행보를 통해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탁치논쟁 정국에서 6대 종교는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주비회와 좌익의 민전준비위원회 둘 모두에게서 초청장을 받았고, 민주의원 28인 의원에도 천주교(장면)·유교(김창숙)·불교(김법린)·기독교(함태영) 등이 종교계 대표로 선임됐으며, 6대 종교는 미소공동위원회 시문에 응할 남한 25개 단체로도 뽑혔다는 것.

그는 “이는 해방에서부터 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 군정이나 건국운동 세력들이 한국의 종교계를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종교계 또한 한국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국가 건설 과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정리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며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족사적 정통성의 골조에 해당하는 삼일운동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만큼 한국교회는 해방 공간에서 비중이 있었고 왕성하게 활동했는데, 이는 미 군정과의 끈끈한 관계 덕분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허명섭 교수는 “미 군정 행정고문 11명 중 6명과 군정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중 7명, 입법의원 90명 중 21명과 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기독교 신자였다”며 “당시 남한 기독교인 숫자는 전 국민의 0.52%로 약 10만여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기형적’일 정도로 많아 보이지만,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적응력과 준비된 인적 자원들이 그만큼 풍부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앞선 예배에서는 박명룡 목사(큰나무교회)가 기도, 김영호 목사(논산교회)가 설교, 유석성 총장(서울신대)이 축사를 각각 맡았으며,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기금을 기증한 故 김영익 집사의 아내 민현경 권사가 유족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