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된 대북 정책'을 강조하며 남북 정상회담을 포기하는 순간을 비롯해 임기 5년 동안의 이야기가 담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공개됐다. 회고록에는 2009년 북측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을 거절했던 때의 뒷이야기가 담겼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는 "저희 장군님께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잘 실천되면, 앞으로 북남 수뇌들이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 의사를 내비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이전 정권이 해놓은 일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남북 간에는 많은 합의가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노태우 대통령과 합의한 문서도 있고, 저는 이 모든 것이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북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대화가 핵 문제 등의 논의를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이에 김 비서는 "예, 알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모두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전 대통령은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좀 잘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이어 원자바오 전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는데 정상회담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북한은 그 동안 남측이 자신들을 만나려 안달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정상회담의 대가나 조건 없이 만나 핵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또 지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대통령 당선에 도움을 준 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친필 서한을 북측에 보내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던 경험을 회고록을 통해 소개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어이가 없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내세웠던 '비핵개방3000 구상'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비핵개방3000을 통해) 북한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우리 정부가 상당 부분 확보했다고 생각한다"며 "임기 내내 '원칙 있는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북한과의 물밑 접촉도 끊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개혁개방과 민주화를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고도 고백했다.
그는 이 밖에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같은 해 7월 국가정보원의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우리가 제시한 원칙 이외에도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면서 "그러자 북측은 쌀 50만t의 지원을 요구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수차례 접촉이 이뤄지면서 천안함 폭침 사과 문제가 논의되는 동안 2010년 11월, 북한은 또 다시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며 "도발을 통해 물적 지원을 받아내곤 했던 행태를 되풀이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그 이전 2009년에도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북한은 쌀과 비료 등 상당량의 경제 지원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이어 "2009년 11월7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북한의 통일전선부 실무 접촉이 있었는데 북한은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합의서를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1억 달러), 국가개발은행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 제공 등이 담겨 있었지만 북측은 자신의 요구를 합의인 양 주장한 것이었다고 이 전 대통령은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문서에 지원 내역과 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 마치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 그 해 5월부터 회고록 집필에 착수, 1년10개월의 집필 과정을 거쳤다.
이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자신의 소회를 모두 12장, 786페이지에 걸쳐 기록했다.
회고록은 ▲1장 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 ▲2장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 ▲3장 외교의 지렛대, 한·미 관계 복원 ▲4장 진화하는 한·중 관계 ▲5장 원칙 있는 대북정책 ▲6장 그래도 일본은 우방이다 ▲7장 외교의 새 지평을 열다 ▲8장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하여 ▲9장 5년 대통령이 100년을 보다 ▲10장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 ▲11장 문화·과학강국이 살 길이다 ▲12장 아쉬움을 뒤로하고 등으로 구성돼있다.
회고록은 다음달 2일 공식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