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이후 교회에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을까? 전쟁을 겪으면서 교회는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였고 전통적 기독교와 다른 교리를 전하는 신종파들이 등장했다고 본국 목원대 김흥수교수는 전하고 있다.

이 당시 여러가지 갈등으로 교회는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신도들은 1950년의 60여 만 명에서 1985년에는 650여만 명으로 10배 이상 급증하였다.

교회와 국가 또는 교회와 사회 관계에서 보면, 일제 식민지 시기와 비교해 볼 때 해방 이후에는 민족 독립의 문제에서 국가 재건의 문제로, 그리고 전쟁 이후에는 사회 복구의 문제로 교회의 관심사가 바뀌어 갔다.

교회사가들의 분석대로(민경배, 1988 : 125-127), 일제 시기 전반에는 히브리 백성을 노역에서 해방시킨 역사의 주재자 '아버지' 하나님의 신앙이 강조되었다면, 1930년대부터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수탈에 지친 가운데 찢기시고 상처 받은 그리스도 상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생의 터전을 상실하고 나서는 확실성의 징표를 드러내는 체험적, 감정적 신앙유형이 유행하면서 성령 체험이 강조되었다. 성령에 대한 강조는 그후에도 지속되어 전쟁 직후에는 주로 일부 평신도 전도자들의 부흥집회나 기도원 집회에서 성령 체험이 중시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오순절 교회에서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다른 주류 교회들에서까지 성령 체험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령 체험을 중시해 온 한국교회의 신앙 부흥운동(revivalism)의 전통은 성령세례와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와 주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의 부흥회, 그리고 기도원이나 개교회에서의 부흥집회 등에서 계승되었다.

6.25전쟁을 전후로 북한의 교회는 철처한 탄압시기를 맞기도 했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종교의식이 발각되기만 하면 모조리 체포하였고 수시로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여 종교적 서적만 발견되어도 불온문서로 취급. 연행하는 등 직접적인 탄압 조치를 시작하였다.

이 같은 조치는 6.25 남침 준비의 일환으로써 후방의 공고화를 도모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다. 6.25 동란은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으로 다가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당국은 교직자들을 대거 체포하였다가 그들이 후퇴하는 시점에서 “모두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해 살해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며 공산집단에 저항했고 국군 및 유엔군이 다시 후퇴할 때에 이들을 따라 대거 남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또 그 때까지 방치하던 종교 관계 건물들을 파괴하거나 구조를 변경해 군수 물자 창고 등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교회당과 예배당 부근에 못 쓰는 대포나 전차 등을 내버려 고의적으로 공습의 표적이 되게 하는 등의 교활한 수법까지 동원하였다.

이에 종교 건물이 미군의 공습에 의해 폭격당하는 것을 목격한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당국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도록 했으며 미국의 공습과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미국의 공습에 대한 공포와 분노는 미국의 종교로 전이되었으며 기독교인은 미군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