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우리는 문명인들이지만, 우리의 정부는 야만인들입니다."

 

"대량 학살자 야누코비치는 도망갔고, 이제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 땅에서 들려오는 외침이다. 3개월째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온 도시가 총성과 화염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100여명의 사람들이 숨졌다.

왜 우크라이나 땅이 이 지경이 되었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통솔하는 정부가, 유럽연합과의 경제협력 협상을 중단했다. 대신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그 때부터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했다. 시위대는 그를 쫓았다. 졸지에 비참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공항에서 헬기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어 쌍방의 총격전까지 벌이면서 승용차로 러시아로 국경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현재 그의 행방은 정확히 모른다.

그가 버리고 간 대통령의 비밀 관저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관저를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메치기랴 공원의 한 구석의 조촐한 집에 살고 있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조촐한 집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 대저택이었다. 여의도 면적의 절반 크기의 땅이다. 저택에는 동물원, 헬기장, 골프장을 보유하고 있다. 인공호수에는 15세기 대형 범선이 떠 있다. 영빈관은 수정 샹들리에와 대리석 바닥으로 장식돼 있다. 내부 장식은 초호화판이다. 수도꼭지도 금으로 되어 있다. 수십대의 초고가 클래식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주차된 차고도 갖고 있다. 저택을 짓는 데 무려 1억 달러(약 1070억원)가 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국가는 부도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란 작자는 초호화판 생활에 미쳐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를 주목해 본다. "호화 시설로 가득한 개인 섬에 초대받아 요트와 연회를 즐겼다." 미국 프로농구 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이 한 말이다. 그는 친구 자격으로 북한을 3번 다녀왔다. 그에게 북한 방문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김정은의 초호화 전용 섬에서 파티와 제트스키, 승마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의하면, 세계 최고의 거부도 김정은의 생활을 본다면 놀랄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직접 본다면 김 위원장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나이에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정은은 최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초호화판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의 권력과 사생활은 왕정시대의 왕에 버금간다. 북한 전역에는 33개의 김정은 전용 별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명산과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전용 별장에는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선착장도 설치되어 있다. 평양 강동별장에는 연회장과 승마장을 새로 조성하고, 중국과 러시아에서 설계 전문가를 초청해 아이스링크 겸용 실내체육관도 건립했다고 한다. 그의 은닉 비자금은 최소 50억 달러(5조6천억원)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김정일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사치를 부리고 있다. 1년간 사치품 수입에 들인 돈만 6억 달러 이상(6870억원)이라고 한다. 사치 선물로 지도층, 엘리트와 그 가족을 달래고 있다. 지금 북한 주민들은 소수의 지도층에 의해 잔인하게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 백성들은 식량난에 허덕이며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느라 정신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풍요로운 수확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추구했던 부자를 가리켜 주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한다. 네가 열심히 쌓을지라도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취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도전한다. 자신을 위해 부요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가난한 사람. 가족을 위해서는 부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난뱅이. 하나님은 그런 자를 그냥 두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호화로운 삶을 통해 인생의 만족을 찾고자 했던 로마의 네로. 그의 결국도 별것 없었다. 수백 개의 아방궁을 짓고 그곳에서 만족을 누리려 했던 중국의 진시황제도 별 볼 일 없이 사라져 버렸다.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보고 사도는 외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놋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3)".

이 준엄한 메시지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향한 것일까? 김정은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로마의 네로 황제를 향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설마? 그러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는가?

최근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우리네 가슴에 애석함도, 감동도 주었다. 완벽한 작품으로 감동을 주었지만, 불공평한 심판 판정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환경 때문에 마음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의 고요는 요동하지 않았다. 마음에는 이미 금메달을 걸고 있었다.

얼마나 고달픈 선수생활이었는지 "모든 것이 끝나 시원하다"고 말하던 게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선수생활을 통해 번 돈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우리네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것도 사람들이 모르게 조용하게. '기부 메달'이라도 전달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는 거짓 영웅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움켜잡기는 잘하지만 움켜잡은 손을 펼 줄을 모르는 소인배들이. 많은 수익을 챙기지만 사원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악덕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매김을 해가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패륜아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봐야 별 것 없는 인생인데.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을 왜 모르는 건지. 처참하게 도망쳐야 하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최고의 인생을 향유했던 다윗 왕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시 39:5)".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야 하는 인생. 그러나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인생. 그런데도 착취와 쾌락과 방종의 삶으로 달려갈 건가? 정직하지 못한 돈을 사랑할 건가? 가진 것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 건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