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모압 경계의 땅, 죠지 교회당 작은 마당 앞
조그만 문으로 들어서자
햇빛 아래서의 視眼이 갑작스레 어두워진다.
조금씩, 교회당 안이 훤해 지면서
바닥 밑에 깔리어 있는지, 드리워 있는지
거의 교회당 바닥 삼분의 일이 모자이크
귀한 지도모양으로 누워 있었네.
이천년을 흙더미에 묻혀 덥혀 온 寶貨
서향을 남향으로 펼쳐져, 페니키아 넘어 갈라디아 밤빌리아
쪽으로는 아직도 땅에 묻혔는지, 아예 지워졌는지..
전체지도 삼분의 일이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진기한 보물
초기 비잔틴 당시의 예루살렘 중심한
이스라엘 도시 중앙 통 거리와 聖殿자리 선명하게
이집트, 지중해 해안까지 뚜렷한 모자이크
이를 초기 순례자들이 찾아보고, 찾아서
성지를 둘러 갔다는 이 대형 지도가 발굴된 기적
기록처럼 명세한 옛적 숨겨진 發顯이
다시 어디 더 밝혀질 근거로, 또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生命이 존재 한다는 의미도
무슨 핏줄 줄기를 타고
나에게 까지 傳受되어
숨 쉬고 다듬어져 오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었을 것,
그리, 신비의 신비에 휩싸이어
떨 리우는 知慧여.
불쑥 날 쑥 그림 모자잌 이야
균형 없는 돌조각 그림이라 할 테지만
세세히 박혀진 色樣 돌 짝 모양으로는
너무나도 반듯해, 혀마저 차지는 驚異
비단 聖地 지도뿐이랴
지구상 어디에서나
오늘날 까지 뛰고 걸어 온, 人間事 이야기인들
지울 수 없는 제 나름, 文明이기에
그 안에서 울고, 그 안에서 발버둥 치고
도망가고, 우쭐 거렸던 모든, 그
모든 꿈틀 임들 속에서의 사실이어야 할진데
오늘의 내 모양조차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한 生命 되어
나의 이정표(里程標)까지도 가다듬어져서
담아내야 하는 삼차원, 아니 사차원(?) 知分
우습든지, 놀랍던지, 모양 새 그 어떠하든
하늘 숨결 다듬는 이 知分일 터이니
숨 쉬어져 가야하고, 만들어져 가야하고
다듬어져 가야 하는, 그렇게
펼쳐내 가야 할 것일 터 이니까_
지금 내, 살아 온 나 혼자 제 나름대로 만으로의 걸어 온 세상을 이제야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느냐고, 담아 다듬어 온 신앙知分을 文化로 감싸 안고 내달아 갈 자세를 곤고히 세워가는 작정을 잇몸 단단하게 물고서 다짐하려 하는 몸짓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當然스런 이유들마저라도 단연히 그 이유들을 젖혀 놓고서라도, 이렇게 이천년의 흙바닥에 깔려져 온 地圖 가지고 만이라도, 하늘 生命의 힘은 여기에도 어쩌지 않게 살아있음이 확고함이기에, 이 다짐은 한결 굳어집니다. 이 연구에 그 종이 장들이 낡아지고 흐트러지도록 또 꿰뚫어 보고, 긴 역사에 따라 남겨 놓인 순례자들이 있었고, 거기에 또 해석도 해보고, 나름대로의 연구들을 다듬어 온 흔적이기에, 이런 다짐을 추호도 부끄러움없이, 소리 낼 수 있음이, 생명이 담아진 이유들로 안고서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자이크 地圖가 두터운 흙 밑에 깔리어서, 왜 이토록 2천년을 다듬어져 흐트러지지 않고 존재하여 내려온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왜 또 그 위에 역사적인 연구 기록은 또 담겨져 있습니까. 그러니 이를 또 누가 어떻게 부인하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요. 이리하여, 사람들이야, 나도 너도 어느 날엔 가고 사라질지라도, 歷史는 살아있는 生命이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그 기록, 그 퇴적(堆積), 그 內容들은 그 아무도 지우게로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살아있는 증언(證言), 증거(證據)들입니다. 聖書는, 그 날 그 기록대로, 宇宙의 결단의 그 날까지, 살아있는 生命임이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지울 자도 없겠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