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호 목사(전 미국 장로교회 중서부지역 한인교회 총무)
(Photo : ) 현순호 목사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고향의 정을 떨칠 수가 없어 최근 한국에 나가 굶주렸던 정을 마음껏 채우고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부요하다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 살았어도 따뜻한 고향의 정을 이곳에서 찾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만 있는 문제일까?

서양 문화에서는 손님이 오면 가까운 호텔에 묵게 하거나 또는 자기집 게스트룸에 머물게 하며 며칠 같이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안방을 내주고 주인은 사랑방으로 옮겨가는 옛 풍습이 오늘도 살아있다. 믿음 안에서 형제처럼 지내는 김OO 집사 부부는 자기들의 안방을 우리 부부에게 내주었다. 몇 년 전에도 같이 사는 외아들을 아파트 게스트룸으로 보내고는 자기들이 아들방으로 가고 우리에게 안방을 내 주더니 이번에도 역시 그리했다, 그 것도 한 달이나 말이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직접 운전을 해서 아름다은 단풍 구경을 시켜주며 가는 곳마다 그곳의 토속 음식을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은 어머니 손맛의 건강식이었다. 또한 그 지역의 유적지나 토산물을 볼 수 있어서 책에서 못 배운 것을 새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한 번 친해지면 오래 지속되는 것이 한국인의 멋이 아닐까!

우리 부부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옛 교인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많은 분들과 정을 나누고 식사 대접도 풍성히 받고 구경도 많이 했다. 그 중에도 유난히 주기를 좋아하는 이OO 집사가 준 책을 집에 와서 열어보니 돈 봉투가 나왔다. 그 액수는 우리 부부의 비행기 값을 비롯해 한 달 쓰고도 남을 돈이었다. 당장 전화를 해서 꾸지람을 했다. 지금 이 집사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막노동을 하며 사는 형편인데 정신 나간 일을 왜 했느냐고…. 당장 돈을 찾아가라고…. 그 전에도 선물 속에 많은 돈을 넣어 준 것을 떠나는 날 알게 되어 비행장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되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당장 돌려주도록 했다. 그 분은 나이가 지긋한 담임목사를 아버지처럼 의지해 왔고 또한 자기가 어려울 때 내가 좀 도와 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돈 때문에 자기 부모도 죽이는 세상, 형제간에도 칼부림을 하는 시대에 옛 성직자에게 다 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 또한 부담이 된다고 사양하는 그 마음은 한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잔잔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시무할 때 집사로 있던 분이 후에 국회의원이 되어 현재 중진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 이OO 의원의 메시지를 받고 전화를 걸었다. 찬송가가 나온다. 지금은 국정감사 기간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이 임무가 끝나는 내일 사무실에 와서 꼭 기도해 달라는 간청이다. 그의 방 중앙에는 십자가가 높이 달려있고 책상 위에는 자신이 부른 찬송가가 CD로 되어 쌓여있어 오는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준단다. 그가 출판한 책 “꿈, 나를 이끌다”는 신앙의 간증집이다. 나는 그와 그의 아내와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홍수 때 천지가 물로 가득 찼으나 정작 마실 물은 귀하였듯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을 못 믿는 현 시점에 이 의원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졸랐다. 나는 이 부부를 믿는다. 전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앙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철저한 국가관으로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고 큰 인물이 되겠다고 느꼈다.

사실 내가 고향에 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옛 친구의 병문안이었다. 춘천에 새로 창립된 학교에 내가 소개해서 평교사로 들어간 그는 40년을 봉직하다 교장을 지내고 은퇴를 했다. 얼마 전에 암에 걸려 3번이나 수술을 했고,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기력이 떨어져 받지 못하는 85세의 친구. 그와 하루 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어서 찾아갔다. 43kg의 몸무게, 소파에 몸을 맡기고 힘들어 하던 친구가 나를 만나자 새 힘이 생겨 마치 다른 사람같았다. 이런 우정이 한국인의 끈끈한 정이 아닐까!
사랑이 담뿍 담긴 따뜻한 정을 미국땅에서도 서로 나누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