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추양 한경직 목사
故 추양 한경직 목사

“목사로서의 그의 인격은 문자 그대로 전인적인 신앙인이기에, 신앙과 생활 사이에 괴리(乖離)가 없고 신앙과 신학 사이에도 모순이 없다. 삶이 표(表)와 리(裏)의 상이(相異)가 없고, 신(信)과 행(行)에도 완전한 일치(一致)를 보인다.”

영락교회 원로장로이며 대광학원과 영락학원에서 일했던 송성찬이 한경직 목사에 대해 한 말이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의 김은섭 박사는 5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학술발표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과, 그 구조와 의미’에 대해 강연했다.

먼저 김 박사는 “한경직은 자신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면서 “이것은 한 마디로 ‘사명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의 리더십, 그 핵심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와 아내에게까지 존칭 사용… 모임에선 항상 ‘부회장’

김은섭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김은섭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그는 한 목사의 섬김의 리더십과 관련해, “한경직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아이에게도 말을 높였다. 항상 주일날 새벽기도와 1부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본당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 주일학교 선생들이 오면 인사하고, 아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자신의 아내에게도 ‘오마니’라고 부르면서 존칭을 사용했다”며 “어린아이와 아내에게까지 존칭을 사용했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또 “한경직은 교회에서 당회와 같은 회의를 할 때도 억압적으로 한 적이 없고, ‘아니오’라는 말을 한 적도 없다고 한다. 회의를 할 때 누군가의 의견이 맘에 안 들면 ‘일리가 있네요’라고 했다. 영락농아인교회의 어떤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나 청년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한경직은 청년들에게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다. 내 잘못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가 적어도 60은 됐을 것이고, 큰 교회 목사가 청년들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섬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어 “이철신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경직은 현직에 있을 때 항상 어떤 조직이나 모임의 부회장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조직한 기구나 모임에서조차도 의장이나 회장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자신은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또 “한경직은 70년대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장 잘했던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 목사가 와서 집회를 할 때,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던 무명의 젊은 김장환 목사를 불러서 통역을 시켰다. 그 뒤에 김장환 목사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세계침례교연맹의 회장도 됐다. 김장환 목사는 한경직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곽선희 목사 또한 그러하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유명한 목사들이 무명의 젊은 목사 시절에, 한경직이 불러서 부흥회 강사도 시키고 한국교회를 위한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기고 하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한 목사의 ‘비전의 리더십’과 관련, “일제 말기는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에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다. 창씨개명에 의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도 잃어버리고, 얼이 담겨 있는 우리의 말과 글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경직은 ‘도대체 이 민족이 어디로 가느냐? 정말로 우리 민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기도처였던 보린원 뒷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환상을 보게 됐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는 ‘나의 감사’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삼천리강산이 내 앞에 펼쳐졌다. 삼천리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형용할 수가 없고, 높고 낮은 푸른 산세에 아름다운 부락들이 많이 있는데, 그 부락마다 흰 돌로 지은 예배당이 보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종소리가 들렸다”고 환상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김 박사는 “한 목사는 광복 이후 1950년 당시 하얀 돌로 영락교회를 세웠고, 차후 이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교회와 한국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월드비전은 그가 ‘이 세상은 비전이 필요하다’라고 해서 만든 것이다. 1950년 5월 밥 피어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경직의 통역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다. 아마도 이 때 한경직이 밥 피어스에게 ‘이 세계를 보라’ 하면서 서울 근교의 비참한 상황, 절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이 사람들을 위해 비전을 제시해 줄 것을 밥 피어스에게 요구했다. 그 결과 월드비전에 만들어지게 됐다”고 했다.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어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오른쪽)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어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오른쪽)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부·명예·권력 누릴 수 있었으나, 바보 같이 그러지 않았다”

한 목사의 ‘실천의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한경직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행일치·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고 회고한다. 성경 말씀 그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을 도우라고 설교를 하고 자신은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말씀 그대로 남을 도왔다. 옷도 주고, 구두도 주고, 돈도 주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줬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존경해서 가져온 돈이나 물품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냥 줬다”면서 “이런 실천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를 존중하며 존경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목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뭐든지 협력하겠습니다’라는 자세로 그의 말을 따랐던 것”이라고 했다.

또 한 목사의 ‘포용의 리더십’과 관련, “나라사랑의 영성에서 나오는 한경직의 독특한 리더십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섬김, 비전, 실천을 모두 아우르는 그의 리더십은 포용이다.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좀 달라도 나라 사랑을 위해서 뭉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신앙의 색깔이 조금 다르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같이 힘을 합칠 수 있는 것이다. 건전한 민주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자신이 목표를 위하여, 한경직은 다른 이들을 섬기고, 비전을 제시하고,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포용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로 꼽혔던 여러 사역자들의 소식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면서 “과연 우리 기독교에는 청담(스님) 같이, 김수환(추기경) 같이, 사회로부터 존경과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없는가. 여기 한경직이라는 인물이 있다. 비록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한 사람이건만 그는 무소유했다. 얼마든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누릴 수 있었으나, 바보 같이 그는 그러지 않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