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동물과 다른 한 가지는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물도 나름대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동물의 생각은 일차적인 것에 머무른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자고, 어떻게 쉬는 것을 넘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차적인 것을 생각하고, 또한 삼차적인 것까지 도달한다. 이차적인 것은 육체를 넘어선 정신의 세계, 이름하여 사랑, 의리, 양심 같은 것이다. 삼차적인 것은 정신을 넘어선 영적인 세계이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이다.
어떤 사람의 비석에 이런 비문이 있었다고 한다. "먹다, 살다, 죽다."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죽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오죽해야 그 비문에 그런 글을 쓰게끔 했을까? 그래도 길가에 묻힌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어느 누가 일말의 애정이 있어서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 비문까지 써 줄 마지막 애정마저 받을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슬픈 인생은 아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비문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사람이 어리석고 답답한 인생을 사는 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 죽은 사람은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주관도 없고, 뜻도 없고, 의지도 없고, 간도 없고, 쓸개도 없이 산 사람이다. 성경에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베드로후서2:17)와 같이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다다다"의 삶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건강의 비결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왜 잘 먹어야 하는지, 왜 잘 살아야 하는지 최소한 이차적인 생각의 문을 열지 못하고 일차적인 사고에 제한된다면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물과 별다른 바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 한 부자가 나온다. 그 부자는 다른 사람도, 다른 가치도, 다른 목표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소출을 늘이고, 잘 입고, 잘 먹고, 재산을 늘리고, 창고를 다시 확장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 사람을 가르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12:20)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이런 승전보를 보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edi, Vici). 이 짧은 "라라라"의 승전보를 통해 가이사의 의지, 목적, 그리고 삶의 뜻을 볼 수 있다.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이 70살을 산다고 하면 25,550일을 살고, 80살이면 29,200일을 살게 된다. 그 많은 날을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닫는다면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 긴장, 황당, 당황하는 일이 없이 감사, 기도, 찬송, 사랑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우연히 만들지 않으셨다. 그 많은 몇 십억의 사람이라도 하나 하나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로 만드셨다. 그 어느 것도 같은 사람은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분량과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행복의 원천이 된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남이 된 것보다는 내가 된 것, 남이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더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사도바울은 "다다다"로 살았던 사람이다. 자기의 육체를 자랑한 사람이었다. 학벌, 재벌, 문벌, 인벌을 내세웠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라라라"로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약한 자를 위하여 살았다. 이차적 세계만이 아니라 영적 삼차원의 세계까지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는 즈음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다다다"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라라라"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인생은 똑같이 죽으나 그 죽음 이후 남기는 비문의 글은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