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덕신부는 무디성경학교의 첫 교장이었던 유명한 루우벤 아쳐 토레아(Reuben Archer Torrey)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지냈고, 자신은 한국에서 평생을 성공회 선교사로 지내다가 소천했다. 오늘 우연히 지인과 만나 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옛날이 생각이 나서 몇 자 적는다.
그러나가, 약 삼십 오년 전이다. 내가 토레이신부집에서 살았을 때였다. 당시 생활이 어려웠던지라, 우리들의 식찬은 아침은 꽁보리밥에 점심은 국수한그릇 반찬이라고는 오직 김치 한조각에 불과했다. 토레이신부의 딸 버니는 언제나 떨어진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어느날 버니가 토레이신부에게 새운동화를 사 주기를 요청하자, 토레이신부는 딸을 사람들이 없는 집 모퉁이로 데리고가 이렇게 말 했다. "버니, 만일 새운동화를 사준다면, 우린 오늘 저녁을 먹을 수없어, 모든 사람들이 식사를 거를 수 밖에 없어, 돈이 없으니까?" 버니는 언제나 똑 같은 대답을 하는 아버지의 말에 체념한 듯 "그럼 다음에 돈이 생기면 사 주세요"라고 말 하곤했다. 그러나 내가 토레이신부집에 머무는 동안 버니는 언제나 구제품으로 보내온 낡은 운동화만 신고 있었다.
한 번은 온 집에 먹을 것이 떨어졌다. 산 나물이며, 감자로 끼니를 연명했지만, 도저히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었다. 신부님은 칠십리나 떨어진 황지로 쌀을 구하러 가셨다. 하루에 단한번 있는 시골 버스 길에 간 밤에 내린 비와 태풍으로 도로가 소실되고 산사태가 나 난리를 쳤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밤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신부님이 버스길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토레이신부님의 성정상 분명히 아는 성도네 집에서 얻어 온 쌀자루를 지고 산 길을 걸어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신부님은 자신이 세운 예수원의 식구들이 밥을 굶는다고 생각해 반드시 밤을 세워서라도 걸어 돌아오실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의 성품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길이 이미 홍수로 덮혀 물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길이 여간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신부님의 사모님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하셨다. 나 역시 잠을 자지 못하고 동네 어귀까지 갔다가 오는 것을 반복했다. 아침 해가 벌써 서산에 떠 올랐는데도 신부님은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사모님은 내게 다시 한 번 동네 어귀까지 가보라고 부탁하신다. 정오가 가까워서야 마침내 신부님은 돌아오셨다. 얻어 온 쌀 한 말을 등에지고 밤을 세워가며 칠십리를 비를 맞으며 걸어 돌아오신 것이다. 남편을 걱정하며 밤새도록 들락날락하던 사모님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용히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신다. 언듯보니 사모님의 눈에는 눈망울이 맺혀 있었다.
어느 날인가 먹을 식량이 다 떨어졌다. 한 번씩 식량이 떨어질 때면 미국 성도들이 보낸 편지 속에 넣어져 있던 종이 지폐들이 우리를 살렸다. 그런데 그 날은 정말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굶는 수 밖에 없었다. 신부님은 구천 명의 고아를 기도로 먹여 살렸던 죠지 뮬러(George Mueller)의 기도를 퍽이나 좋아 하신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믿음으로 사신다. 아무 먹을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식탁에 우리를 둘러 앉게 하신 신부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식사기도였지만 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기적을 기다렸지만 기적은 생길 수가 없었다. 그 산중에 누가 먹을 것을, 어떻게 지금 날라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식사기도가 끝나자 하늘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다 밖으로 튀어나가보니 하늘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내려 오고 있었다. 언젠가 피서를 온 미국대사의 딸이 예수원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해 특별히 아버지가 8군 사령관에게 부탁해 PX에서 양식을 사서 보내었던 것이다.
나는 토레이신부님과 함께 살았던 그 젊은 뒤안 길을 그리워 한다. 가난했지만 언제나 우리는 풍부했다. 때로는 배가 고팠지만, 그러나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돈이라고는 생길 때도 없었지만, 언제나 우리는 아무 걱정도 없었다. 내가 토레이신부와 함께 사는 동안 그의 지갑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여 우리들에게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