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편 묵상 나눔의 아침입니다. 오늘도 새 힘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함께 나눌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1-5)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시인의 안에 있는 모든 마음과 생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자원하는 마음이 시인의 중심에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대해 시인은 이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시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그 모든 은택을 기억하도록 자신의 영혼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영혼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그 귀한 혜택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인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파노라마와 같은 생생한 영상들로 서로 연이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주님께서 시인의 모든 죄악을 사하셨습니다.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 죄사함 받은 은혜의 감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사하심에서부터 시작됨을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우선 기억합니다. 시인이 죄사함을 받은 효과는 몸과 영혼의 질병으로 부터 고침을 받게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죄악이라는 원인이 제거됨으로 인해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생겼던 모든 병도 점차 없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스펄전은 시인이 받고 있는 복된 상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본절의 두 가지 축복을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축복을 노래했으며, 날마다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를 치유하시는 여호와를 송축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노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스펄전 시편강해/ 시 103:2).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파멸의 웅덩이에서 구속되었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병을 고치시지 않으셨다면 시인의 생명은 멸망할수 밖에 없는 처지에 계속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고백하고 있는 구원의 은혜를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더욱 찬양하도록 고무시키기 위해서 그는 '긍휼로'라는 말을 복수로 덧붙이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 긍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치 '전후와, 좌우와, 상하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게 나타나 있어서 도무지 그 은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의 감격과 그 은택을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5절).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하신 뜻에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날마다 만족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만족하게된 소원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의 청춘은 항상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시 103:4-5) "신자들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항상 육체적인 활기가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속적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바가 어떤 의미에서 저희에게 적용이 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되는 사실이다. 이는 저희 모두가 무덤에서 구속함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저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저희 각자가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은택을 입고 있는가를 바로 살펴보았더라면 저희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라고 고백할 충분한 이유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아서"(시 40:5) 하나님의 은택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