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량
(Photo : 기독일보) 정인량 목사

정지용(鄭芝溶)은 그의 대표적인 서정시 '향수'(鄕愁) 한편으로 한국인의 심성에 영원한 고향을 선물한 토속시인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를 읊조리고 있노라면 지용에게 언어의 연금술사라 명명해야 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마땅히 소월, 목월과 함께 한국의 계관시인의 반열에 올려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한국의 아름다움을 워즈워드처럼 노래한 자연시인은 아니다. 그의 시대의 괴짜였던 이상처럼 떼까당스한 점이 없지 않았고, 그가 귀의한 캐톨릭의 영향을 받아 종교시에 기웃하기도 했으며, 그의 문우였던 홍사용이나 김영랑 등과 모더니즘의 산파역을 맡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김구를 추종한 민족주의자인 반면에 당시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우상인 여운형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편력이 그로하여금 구절양장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때 납북인가, 자진 월북인가를 놓고 시비가 붙어 그의 시는 정치적 구금상태에서 사망선고를 받았고 민주화와 더불어 해금되자마자 그의 시는 담박에 노래로 담아 대히트를 치게되었다. 특히 대중가수인 이동원과 클랙식가수이자 음대 성악교수인 박인수가 이중창으로 부른 '꿈엔들 잊힐리야'는 한국의 시가 대중화되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가 노래한 아름다운 고향이 없다. 월남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모로부터 조상의 고향을 전설로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터라, 지용의 고향 충북 옥천으로 대리 만족한다. 아버지의 고향 평북 철산(평안도 발음으로는 털산이다)에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있으려니 상상할 뿐이다. 대가를 이루었던 조부의 사랑 쪽마루에 짚벼게는 아니더라도 목침을 베고 누워 엺은 여름 잠에 취한 할어버지의 콧수염을 건드리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짧은 몽당치마를 입고 시내에서 물장구치는 어린날의 내 고모들에게 풀섶 이슬에 함추름 적신 반바지를 입고 나타난 조카가 되어 물보라를 일으켜 깜짝 놀라게도 했을 것이다.

그는 한때 평양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휘말려 향년 49세로 사망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는 문학지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켜 한국 자연시의 명맥을 잇게하였다. 지용은 반백의 나이를 살면서 향수 한편으로 한국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시성(詩聖) -인도의 타골처럼-이 되었다.

아! 왜 대한민국은 이런 시인을 귀히 여기지 않고 일찍 보내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