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도권의 한 비정규노동센터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노동자'의 이미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노동자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식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청소년들은 노동자를 동남아, 일개미, 돈 버는 기계, 못 배운 사람들, 힘든 일 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당장 노동자, 노동조합에 대해 생각해 보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법파업, 귀족노조 등과 같은 단어들이다. 단체 행동과 단결권이 법으로 보장되고, 파업도 엄연히 법이 정하는 정당한 노동쟁의의 형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TV에서 한번도 합법적인 파업을 본 적이 없다. 으레 파업 앞에는 불법이 붙어서 마치 불법파업이 한 단어처럼 들린다.
심지어 몇 년 전 지하철 노조에서 출퇴근 시간에 차량운행 시간과 정차시간을 지키는 '준법투쟁'을 하겠다고 하자, 준법 투쟁도 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법 해석을 하는 것을 보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노동자와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첫째, 용어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들 수 있다. 북한과 이념적으로 대치하면서 우리는 북한이 선전용으로 쓰는 단어를 함께 쓰는 것을 꺼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무'대신 '친구'가, '노동자'대신 '근로자'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더 선호하게 된다. 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이념과, 분단 상황이 빚어낸 결과이지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라고 하겠다.
둘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수 세기에 이루어 놓은 경제성장을 압축적으로 단 시일 내에 이루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는 하드웨어 문제일 뿐, 이를 활용하는 소프트웨어인 '사고'의 영역은 아직 경제성장을 따라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봉건질서는 '양반문화'였다. 양반사회에서 양반은 고용주이고, 노동이란 하인이나 하는 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쉽게 바뀌고 있지 않는 것이다.
셋째, 비합리적이고 과도한 교육열을 들 수 있다. 부족한 천연자원과 분단과 전쟁의 위협, 가난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교육'이었다. 못 먹고 못살아도 우리 아이들만은 공부시켜야 한다는 부모님 세대의 희생은 우리를 세계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나친 교육열은 육체 노동자보다 지식 노동자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냈고, 직업의 종류가 인생 성공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넷째, 사회 구조적 문제를 들 수 있다. 정당한 노동만큼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는 노동에 대한 인식을 낮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자녀를 양육하고, 힘들고 지칠 때 큰 마음먹고 훌쩍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굳이 노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 구조가 아무리 개미처럼 일해도 이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TV에서는 마치 전국민을 '신데렐라 신드롬'에 빠뜨리려는 듯 재벌 2세의 사랑이야기로 가득하고 그런 틈새로 한탕주의, 기회주의가 들어 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노동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 받은 ‘성직’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노동자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5장 17절).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동을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도 세상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노동의 선언이다.
선호하는 노동은 있을지언정, 하는 일로 인해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 한만큼 정당하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것이 신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