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enism과 Judaism에 대한 오해들
6) 아고라의 뜻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어디에 있었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중요치 않은 것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카데미아의 소재지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플라톤이 너무나 유명한 철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아는 아고라에 있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도 에피쿠로스가 세운 정원학교도 그 곳에 없었다. 예외적으로 설립당시 자체 건물이 없었던 스토아학파만이 아고라 안에 있는 스토아 피킬레라고 하는 건물에서 시작하였다.
스토아학파란 이름은 그 설립자 제논이 이 스토아에서 가르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이 건물을 빌려 쓴 것은 아니고, 마치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가르친 것처럼 설립자 제논도 아고라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곳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후에 자체건물을 구했을 때, 그것은 아고라에 없었다. 이들 학파들의 학교가 이곳에 없었던 이유는 아고라 안에는 국가의 공공건물들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곳에는 사설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정부청사나 또는 공공시설들만이 있는 곳에 사설학원이 세워질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고라를 개역판 우리말 성경에는 “저자” 즉 시장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이곳은 고대 폴리스의 공공생활의 중심지(civic or public center)로서 법정, 의회, 신전, 체육관 등 공공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공공행사들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이 속에는 물론 시장도 있었으나 이 시장은 국가의 철저한 규제를 받아 운영되는 국영시장으로서 현대의 시장과는 사뭇 다른 곳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의 중심지인 포럼(Forum Romanum)과 같은 곳이다.
7) 아카데미아의 소재
아카데미아는 당시로는 아테네 성곽밖에 있었고,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테네 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좀 떨어진 콜로킨투(κολοκ?νθου)라고 하는 곳에 있었는데, 고린도로 가는 길을 타고 가다 보면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길 북쪽에 위치해 있다.
아카데미아라고 하는 이름은 전설적인 영웅 아카데모스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바로 그 자리에 그를 모시는 사당과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카데미아의 터는 1929년에 희랍건축가 아리스토프론에 의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필자가 1991년 8월 아테네를 떠나오기 얼마 전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발굴 작업이 아직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모 기독교신문에 그 신문의 발행자 되시는 분이 성지순례를 하시면서 쓴 기행문이 실렸는데, 그 분이 쓴 아테네에 대한 글에도 아카데미아가 아테네의 아고라에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여행을 다닐 때, 특히 아테네나 로마를 여행할 때는 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다닌다. 유럽인들은 대체로 영국에서 나온 “블루 가이드(Blue Guide)”를, 미국인들은 하버드대학에서 발행한 “렛츠고(Let’s Go)”를 흔히 사용한다.
후자는 싸고 좋은 숙박소와 식당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는 장점이 있으나 깊이가 없고, 전자는 깊이는 있으나 그런 실용적인 안내가 없다. 이 “블루 가이드(Blue Guide)”는 비단 문외한뿐만 아니라 고대희랍의 문화와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도 이용할 정도이니 이것만 보아도 그 수준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 가운데는 이런 가이드북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드물다. 그러나 필자가 아테네를 떠나올 때쯤에는 한국에서 발행된 가이드북을 가진 분들이 더러 눈에 띄었었다.
이들 가이드북에도 고대 아카데미아가 위치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그 분이 고대희랍의 역사책이나 플라톤에 관한 서적은 그만 두고라도 이런 널리 알려진 여행안내서만이라도 참고하였다면 위에 적은 그런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반여행객이라면 몰라도 신문사 발행인으로서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8) 소크라테스의 감옥과 사도바울의 감옥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감옥과 바울의 감옥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동남 편에 필로파푸스라고 불리는 낮은 산이라고도 할 수 있고 높은 언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에서 이 언덕으로 가려면 그 사이에 있는 큰길을 건너게 되어있다.
길을 건너 언덕을 향해 가는 길 왼편 경사가 심한 언덕에 사람이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당국에서 그 입구를 격자식의 철장으로 막아 놓았다. 이것이 소위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한국 안내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지 안내인 들 중에도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아테네의 감옥은 이곳이 아니라 아고라 안에 있었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록 파이돈을 읽어보면 감옥이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방이 몇 개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가 갇힌 감방은 침대가 놓여 있는데도 많은 방문객들이 그 방에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신 후에 방안을 이리 저리 걸어다닐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 감방 외에 간수가 기거하는 방이 따로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목욕실이 따로 있었다.
역사적인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도 플라톤의 파이돈이란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위에 말한 토굴이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필자와 함께 아테네에서 공부를 하던 사람들 중에 숭실대출신으로서 후에 중앙대학교의 교수가 된 김내균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의 은사가 되시는 한국에서 ‘철학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안병욱 교수님이 아테네를 방문하셨을 때, 그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가서 그 곳이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했더니 그 분이 퍽 감회 깊은 표정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그리고 빌립보 유적지에 가보면 유적지 북쪽으로 대로가 지나고 있는데, 그 길 건너편에 조그만 방같이 보이는 토굴이 있고 이것의 입구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역시 격자 쇠창살로 막아놓았다. 이 장소는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아테네에 있는 굴보다는 약간 크지만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규모가 너무나 작다. 뉴저지 안디옥교회에서 시무하셨던 황은영 목사님도 설교 중에 그 분이 빌립보에 가셨을 때 안내로부터 그 곳이 사도바울이 갇혔던 감옥이라는 말을 들으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16:23-29에 보면 사도바울이 갇힌 감옥 역시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분리되어 깊은 옥에 갇힌 것이나 간수가 불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는 사실이 그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은 분이라면 그 곳이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할 때는 비록 안내서를 미리 읽지는 못할지라도 그에 관련된 성경을 한 번쯤 미리 읽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목사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9) 플라톤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 철학과 소크라테스 철학의 결합인가?
그런데 이처럼 일반인들이나 비전문가들이 고대희랍 특히 유적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학계의 이름있는 분들이 보다 중요한 사실들에 대해서 유사한 실수를 범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과
의 저자로, 그리고 신약학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로 알려져 있는 데이비스(Davies)교수는 한 때 호평을 받은 바 있는 그의 책 신약에의 초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세기의 모든 철학적 경향들 뒤에 플라톤의 모습이 멀리 우뚝 서 있다. 그가 잉태한 플라톤철학은 아마도 그 이전의 두 힘 즉 소크라테스주의와 헤라클리토스주의의 결합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만물이 끊임없이 유전하고 있다고 한 헤라클리토스에 동의한다. 그 결과로 이것들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의 대상은 불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정의(definition)는 보편자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데이비스는 여기서 서로 관련이 없는 두 사람의 사상을 연관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희랍철학에 대한 그의 오해 내지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헤라클리토스의 사상과 결합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아니라, 그와는 대조적으로 존재는 하나며 불변하다고 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이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세상에 불변하는 진리도 가치도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사상과 대조되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사상은 감각적 세계에,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 그리고 보편자들에 대한 탐구는 정신적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영혼과 우주에 대한 견해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희랍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속한다. 데이비스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플라톤 연구로도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대학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 후에 미국에서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와 저명한 대학들 중의 하나인 듀크대학교(Duke University) 에서 가르쳤는데, 그런 그가 이런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희랍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6권으로 된 희랍철학사를 쓴 거트리도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