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오래 전에 “20세기는 동양 종교들과 기독교를 혼합한, 제3의 천년기의 거대한 보편 종교가 처음 등장한 세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앞날을 미리 내다본 탁월한 식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교회야말로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선포했던 사람이다. 세계적인 비교신화학자인 죠셉 캠벨도 불교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임을 내다본 바가 있다.
이들의 말처럼, 현대 기독교는 불교를 포함한 동양 종교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기독교 신학자로 알고 있는 슈바이처,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 동양 종교의 영성으로 가득 찬 가톨릭 신부였던 토마스 머튼 등 모두가 복음에 동양의 종교적 사상을 접목하거나 혼합한 20세기의 유명한 사상가들이었다. 이러한 현 추세의 혼합주의적 성향에 편승하여 유사 복음을 외치는 이들은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있다.
유사복음을 환호하는 세대
2007년 12월 23일 ‘폭스뉴스선데이(Fox News Sunday)’에 출연해서 “몰몬교가 진정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 목회자가 있었다. “나는 자질구레한 것 따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타종교인이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예수를 안 믿으면 천국에 가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아주 조심해야 돼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CCN의 토크쇼인 ‘래리 킹 라이브’에서). 30,000명의 교인을 거느린 메가처치의 목회자이자 번영의 신학으로 유명한 조엘 오스틴의 주장이다. 긍정의 힘으로 포장된 그의 복음은 이전에 낙관론적 삶의 태도와 성공을 복음이라고 외친 로버트 슐러와 긍정적인 사고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노만 빈센트 필의 유사복음과도 공명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사복음은 성경이 가르치고 선포하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종교 간 사랑, 화해, 평화, 공존해야 한다고 크게 외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선포, 인간의 죄성과 회개의 요청, 성령의 역사와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뺀 유사복음으로 물든 기독교는 과연 기독교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잃은 인류가 갈 수 있는 마지막 길은 자신이 신이고 부처라고 선포하고 믿는 주술적인 일만 남았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작은 신으로 인식케 한 계몽주의 사조 이후, 인류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끔찍한 제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맞이하였다. 각 종교 안에 있는 영성의 색깔과 내용은 분명 다른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영성과 인간을 향해 너가 신이고 부처라고 하는 동양 종교의 영성과는 차원이 다른데, 이것을 억지로 조합내지 혼합하려 한다면 기독교의 정체성과 영성을 해체시키려는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다. 타종교와의 연합내지는 혼합이라는 명목으로 혹은 대중적 기호에 맞추어 기독교적 정체성을 내려놓는 현상이 기독교계 바깥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종교다원화된 미국의 현실
현대의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다원화 사회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종교에도 적용된다. ‘종교다원’은 이 시대의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 동양 종교와 사상이 유입되면서 기독교가 주도하는 시대는 서서히 물러가고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는 말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밖에 모르던 서구문화에 다양한 종교 전통을 지닌 아시아 인구가 유입되면서 종교 다원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 인구의 유입보다 종교 다원 현상을 더욱 가속시킨 것은, 전방위로 뻗어 나가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여러 다양한 종교 전통의 전세계적 공유에 있다. 그러나 종교 다원 현상을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 여러 다른 종교로부터 기독교 복음이 간직하고 있는 독특성, 유일성, 계시성을 버리는 것은 기독교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반(反)복음적 행위다. 이러한 급진적 이념 운동을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란,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이고 이념이다.
종교 다원 시대 속에서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다원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맞닥뜨린 주요한 현안은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문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과제다.
유사복음은 ‘다른 복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시도한 ‘제1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라’는 신앙의 본질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에큐메니칼(ecumenical), 즉 교회일치 운동가에 의하여 시도된 소위 ‘제2의 종교개혁’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라’는 교회의 본질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3의 종교개혁은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과 관련될 것이다.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95개 논제를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 교회의 문에 내건 이후 500여 년이 흘렀다. 지난 500여 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 문화와 궤적을 같이하면서 그것의 큰 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1세기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기독교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거센 도전 앞에서 개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지, 아니면 힘없이 무너질지는 21세기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정체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부단한 개혁’이라 한다면, 내리막길에 있을 때도 복음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개혁해 나간다면, 우리는 오르막길로 겸손히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부침(浮沈), 성하고 쇠할 때가 있듯이 기독교 역사에도 부침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 전파의 사명은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면서 복음전파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일부 자유적인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입장은 성서적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타 종교와의 대화의 수준을 넘어 혼합 내지는 기독교적 알짬을 버리는 행위는 바울이 저주한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1세기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바울의 외침이 기독교적 정체성을 잃은 이도저도 아닌 잡탕 영성에 물들지 않도록 21세기 현대 교회를 흔들어 일깨우는 각성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