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삶의 균형의 필요성
본 연구원에서 한가지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균형' (balance)이다. 특히 사고의 균형, 목회와 신학의 균형, 삶의 균형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삶의 총체적인 균형(holistic balance)이다. 왜냐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의 [칼빈주의에 대한 강연]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 신앙이란 일종의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삶의 체계'(life-system)요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사고와 신앙은 결코 개인의 삶과 세계관과 분리할 수 없는 총체적인(holistic) 것이기 때문이다.
1. 먼저 사고의 불균형을 생각해보자.
우리 한국인의 사고 체계는, 최근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균형보다는 극단적이고 충동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많다. 한마디로 매우 집단 군중심리로 충만한 듯하다.
광우병 사건에서의 사고의 불균형.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한국의 광우병 사건 당시의 한국인의 태도이다. 거기엔 국민의 정서와 군중심리를 충동하는 미디어와 이것에 호응하는 인터넷의 무차별적인 인민재판식의 일방적인 견해 뿐이었다. 동조가 아니면 무조건적인 반대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에서 매도된다. 북한인지 남한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반대의 생각에 대한 배려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우기 거기엔 사건의 내용을 침착하고 냉정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고의 균형은 없다.
일본과의 독도 문제에서의 사고의 불균형.
일본과의 독도 문제를 생각해보자. 벌써 몇 십년 동안 일본과 한국 정권이 바뀌면서 동일한 수법을 고수하는 일본의 수법에 그저 감정적인 대응뿐, 국민적 감정의 충동뿐이다. 신문을 보니, 한국에서 일본의 쓰나미 재해에 대한 원조를 보내려는 시기에, 한국이 독도를 강제 점령했다는 식의 내용을 일본 교과서에 넣겠다고 한다. 한국이 또다시 술렁인다.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는 아직도 일본 독도 문제에 대한 세계 학계에 독도 문제의 문제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할 만한 학자나 전문 기관조차 없다. 있어도 그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고, 그저 미국 신문에 독도는 한국땅인 것을 광고하는 일회적이고 이벤트적인 대처 방법 뿐이다. 지금까지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행된 것이 없었다. 당연히 세계 해양법에 대한 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일본은 오랫동안 세계 해양법에 대한 학자 뿐 아니라 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우리는 그저 감정적인 대응이 전부요, 거기엔 깊은 사색과 연구에서 나오는 사고와 학문의 균형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학계는 매우 균형을 유지하는데 오랜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오래 전 한국에서 대학에 있었을 때, 일본에서 연구를 하고 오신 선배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다. 내가 질문하길, 일본과 한국의 대학의 차이가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선배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은, 일본은 대학이 결코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학문의 길에 올인한다고 한다. 심지어 오래되고 좁은 실험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충동과 포플리즘에 휩싸이지 않고, 사고의 냉정함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학문 영역에서의 사고의 불균형.
한국의 학문 영역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기대한다. 오래 전에 필자가 참석했던, 한국의 미국문화원에서 매주 진행된 미국문학 전공 대학원생들과 교수들이 모이는 미국학연구회를 생각해보자. 평소엔 30여명 정도면 많은 인원이었는데, 어느 날엔 장소에 사람으로 꽉찼다. 이유는 당시에 미국의 여류 흑인 소설가인 토니 모리슨이 노벨상을 받은 직후였기에, 전에는 없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것은 학문계의 포퓰리즘과 소위 장사되는 분야에만 몰리는 현상의 한 예일 뿐이다. 물론 영문학만일까?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이 전공을 관심없고 모두가 고시 준비, 의대 시험 준비, 영어 공부 준비로, 인문학과 기피, 이공학과와 기초 학문 기피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요, 소위 멋진 스펙쌓기 열병을 앓고 있다. 여기에서 어디 사고의 균형과 다양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2. 신앙과 신학에서의 불균형-조엘 오스틴 목사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불균형적인 태도.
이런 한국인의 사고의 균형에서 일탈한, 충동적이고 인민재판식이의 일방적인 사고의 방식은 여기에만 지나지 않는다. 바로 신앙과 신학에도 그대로 전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소위 조엘 오스틴 목사 스토리다. 텍사스에서, 아니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인 교회 목사로, 한국에서 [긍정으로 힘]으로 번역된 [Your Best Life Now]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이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한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의 소위 유명한 목회자들의 추천사로 가득찼고, 불티나게 팔렸다. 일방적인 찬양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엔, 이 책에 대해 매도하는 글들이 인터넷과 교계에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의 글에 십자가와 죄가 없고,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내용들이다.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일방적인 찬양 아니면 매도라는 태도이다. 어떤 사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균형잡힌 견해가 아니라, 일방적인 찬성이나 반대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필자는 오스틴의 책을 영어본과 한국어본을 성도 한분으로부터 선물받아서 몇 번을 읽어보았다. 장점으론, 거기엔 탁월한 예화, 삶을 격려하는 메세지.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의 섬김(자선)의 역할을 잘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복음주의 기독교 책이라고 할 수 없는, 십자가와 죄에 대한 진리나 심지어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매우 '독자에 친근한,' 철저히 미국의 자본주의적 상품의 전형적인 글이다. 더우기 그는 다른 곳에서, 다른 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기 주목해야 할점은 바로 '오스틴 목사' 사건에 대한 보다 균형잡힌 견해라는 것이다. 그의 책의 장점과 함께 그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복음주의 기독인의 태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찬양이나 매도가 아니라, 균형이다.
3. 목회자/목회의 불균형-목사인가 매니저인가.
이런 신학적이고 신앙적 태도는 결국은 목회적 태도조차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다. 소위 말해서, 세미나와 대규모 집회 중심적인 프로그램, 이벤트적인 목회 풍토이다. 목회자들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고 목회를 사역하기보다는 소위 유명한 강사나 목사나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세미나에 이리 저리 쫓아다니느라고 분주하다. 대형 교회들도 진지한 신앙과 신학에 뿌리박힌 내실있는 신앙보다는 이벤트성 행사들을 끊임없이 진행한다. 목회자들이 이젠 목사들이 아니라, 유진 피터슨의 지적대로, 그저 매니저로 전락해버린 느낌이다. 여기에 어디, 성경에서 말하는 목회와 신학, 신앙과 삶이 균형잡힌 건강하고 통합적인 영성이 있을 수 있을까?
성도의 불균형.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리더들이 이렇게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데,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할까?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순수성, 성경에 대한 깊은 확신보다 영적인 현상에 미혹된다. 물론 성령의 은사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강조해도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영적 현상에 대한 태도, 무엇보다 성경보다도, 영적 리더의 가이드조차도 무시하는 태도는 우려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소위 정통주의라는 미명하에, 성령의 기미도 숨쉴 수 없는 냉냉한 교회도 있다. 극단적인 이성주의적인 교회 현실이다. 필자가 언젠가 시카고의 한 교회를 방문했는데, 정통주의 교회였는데, 정말로 예배 중에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정숙함이 나를 압도(?)했다. 목회자들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조차도 신앙의 균형이 아닌, 위험하고 극단적인 '감동'에서 위로와 감격을 경험한다.
한국의 현 교회에 대한 불균형-기독교적 막장 드라마인가.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의 대표모임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금권선거, 대형 교회의 소위 유명 목회자들의 돈, 섹스, 권력의 문제로 인해서 말그대로 '막장 드라마같은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이런 교회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과연 무엇인가? 일방적인 매도일까? 아니면 찬양일까? 물론 찬양할 사람들은 없겠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은, 바로 근원적이고 균형잡힌 견해와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즉 왜 우리 기독교의 현주소가, 현대 한국의 안방을 돈, 섹스, 권력의 마법으로 막가는 '현대판 막장 드라마'가 되었는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다. 아울러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다. 여기에는 쇼맨쉽적이고 즉흥적인 임시변통의 해법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심도있는 원론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법, 나아가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와 그 대안에 대해서는 곧 이 칼럼을 통해서, 왜 우리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절실한가라는 제목으로 피력될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삶의 영역에서의 불균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다양한 영역의 불균형은 자연히 삶의 총체적인 불균형을 가져온다. 왜냐면 위에서 언급했던 카이퍼의 견해를 빌면, 개인의 사고와 신앙은 개인의 삶과 세계관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총체적인(holistic) 것이기 때문이다.
5. 마무리-삶의 총체적 균형의 회복을 위하여.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를 포함한 우리 한국인들이 사고와 학문, 신학과 목회, 나아가 삶의 전체에서 균형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불균형의 현상이 한국 교회만은 아니다. 미국 교회사에서도 18세기의 1차 대각성 시기인 1740년대에도 이미 팽배했던 것이었다. 당시에 한편에선 부흥운동을 극단적으로 강조해서, 성령의 신비적인 현상에 극단적으로 경도된 측이 있어서 사회 문제를 일으켰고, 한편에선 그 반대로 극단적 이성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서 신앙에서의 감정을 무시하고 심지어 부흥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 양측의 문제점에 대한 집요한 분석을 기초 위에, 그 대안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에서 보여준 '빛과 열' (light & heat), 건강한 이성과 열정의 균형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뜨거움과 성경의 건강한 지성의 철저한 균형이라는 것이다.
본 연구원의 역할의 중요성.
이상에서 살펴보았던 한국 교회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균형의 배경 가운데, 우리 연구원의 사역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우리는 워싱턴 트리니티 연구원을 통해서, 특히 복음과 믿음의 거장들을 통해서 ''철저한 균형--사고와 신학과 목회와 삶의 균형,' 즉 '총체적인 삶의 균형'을 철저히 배우기를 원한다. 일예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보여준 철저한 균형의 신앙과 목회, 총체적 삶의 균형이다. 나아가 이러한 통찰과 배움을, 우리 각자와 가정, 교회와 지역 사회에 적용해서,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건강한 삶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창출하는 것이 궁극적인 방향이다. 앞으로 이 워싱턴 디씨 지역을 중심으로, 총체적인 삶의 균형이 회복된 개인과 가정, 목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면서, 함께 오늘도 함께 땀과 눈물을 흘리고자 한다.
천국의 나그네는 좁은 길에서 쉬지 않는다. 분명 이 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마 7장)이요 더디는 길이요 결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은 아니다. 심지어 많은 반대와 질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우리 목회자와 성도와 교회,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이기에, 거창한 구호나 캠페인이나 운동이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소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충성스런 공동체가 되어서, 뚜벅뚜벅, 흔들리지않고, 용기있게 걸어갈 것이다. 말그대로, 천국을 향한 나그네는 결코 쉬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