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라는 단어처럼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는 서구 사회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화적 코드다. 이 개인주의는 서구화된 사회 속에서 그 맹위를 떨치면서 우리의 신앙조차도 원자화내지 무력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다”,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일 뿐이야”,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어”라는 말이 그런 말들이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는 우리의 신앙 저변이 서서히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반기독교적 정서와 반복음적인 도전은 더욱 거세졌는데, 크리스천 공동체를 세우고 지키는 토대와 담벼락은 도처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타종교와 비교해서도 그 공동체가 와해되는 속도는 보다 급격하고 광범위하다. 오히려 서구 사회 속에서 이슬람 세력은 확장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출산을 통한 자연 증가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그들의 단단한 결속도 그들의 공동체를 키우는데 크게 한몫을 하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의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있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을 꼽으라면 개인주의를 들 수 있겠다.
개인주의의 정의와 역사
‘개인’을 뜻하는 ‘인디비둠(individuum)’이라는 라틴어 단어가 생겨난 것은 중세였다. ‘개인주의’와 관련된 오랜 흔적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에서 찾을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의 관심 대상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4~16세기 르네상스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아들로서 개인주의는 태어났다. 알랭 로랑은 그의 저서 《개인주의의 역사》에서 ‘개인주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개인주의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부작용과 폐단으로 점철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개인주의를 반사회적인 내향적 태도로 축소시키거나 폐쇄적 이기주의 예찬으로 왜곡시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아주사퍼시픽대학교 교수인 “스티브 윌킨스와 마크 샌포드는 자신들이 공저한 《은밀한 세계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개인주의는 적절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나의 특별한 관심과 목표를 최대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주의가 추구하는 각 개인의 고유한 위엄과 거룩함은 분명 소중한 것이다. 개인주의와 종종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와 나아가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교회와 집단과 국가가 개인을 구속하고 심지어 학대한 역사도 분명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주의는 이러한 조직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태동한 사조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개인주의는 개인을 우주의 가장 일차적 실재로 삼게 된다.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만이 메울 수 있는 여백을 하나님 대신 인간 본위의 것(탐욕)으로 채우려 들 것이다. 우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허무한 현주소이고, 인류의 미래가 암울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 신앙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는 것
앞에서 로랑은 개인주의가 지닌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로랑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인간 개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강한 본성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일으킨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맘몬을 세운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맘몬의 강력한 힘에 편승한 물질만능주의는 개인을 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개체라는 괴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개인들이 살아가는 세대는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하기는 커녕, 위에 계신 하나님도 망각의 대상이 되고 만다.
개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 문제는 나의 목적이 나의 수단을 정당화하고, 내가 내 실재의 중심임을 믿는 것이고, 나 말고 다른 어느 누가 나의 목적과 방식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나와 타인을 동일한 존재로 놓지 않게 되고, 내 가치와 삶의 방식이 타인의 것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성과 역량이 뛰어난 개인은 있을 수 있어도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다. 현대 교회가 그러하다. 자질과 역량이 뛰어난 구성원은 많지만, 그들을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하나로 묶는 공동체성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복음의 정신을 향해 하나되게 하는 구심력보다 그것으로부터 끌어내 세속적 가치에 물들게 하는 원심력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분에 의해 운행되는 우주에서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우주를 꿈꾸는 이들로 사회가 채워질 때 혼란과 죽음의 문화가 판쳤다. 이러한 반복음적인 가치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만드시고 이끄신 것은 제자 공동체였다. 로마 제국 안에 바울이 세우려고 했던 것은 복음의 정신으로 세워진 대안공동체였던 가정교회였다. 바울이 서신을 보낸 것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였다. 도시마다 한 개에서 다섯 개의 신앙 공동체가 세워져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복음의 정신으로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었다. 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40~60여명씩 모이는 작은 단위의 신앙 공동체들이 하나가 되어 무력으로 거짓 평화를 구축한 제국을 전복시키고 이 땅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경하였다. 성서시대부터 지금까지 뛰어난 개인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정체성에 기댄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교회는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공동체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큰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한 도전과 위협은 우는 사자처럼 교회 중심과 외곽을 가리지 않고서 공격하고 있다.
21세기의 가장 큰 위험, 기독교 공동체의 와해
교회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요 군사라고 하는 그 정체성이 우리를 우리되게 한다. 개인주의가 이 땅에 만연한 것은 그것이 악한 본성과 쉽게 결탁하는 취약함 때문일 것이다. 개인은 탐욕에 쉽게 물들고, 개인주의는 그 탐욕에 눈멀어 무신적(無神的)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사조가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 교회의 공동체성은 무너지고 만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탐욕의 상징인 자신의 ‘배(belly)’를 자신의 신(神)으로 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경향은 1세기 교회만의 형편이 아니라 현대 교회의 위태로운 정세이기도 하다(빌 3:19). 공동체는 가장 작은 자들을 돌보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자란다(마 25:25-46).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21세기의 거친 격랑을 헤치며 나갈 동력 없는 선박과도 같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그 공동체를 크리스천의 확고한 정체성 위에 더욱 튼실히 세워야 할 때이다. 그리고 무너진 곳이 있다면 지체하지 않고 보수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