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는 그의 서시(序詩)에서 부끄러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이 짧은 엽편시 때문에 한국의 시단에는 큰 파장이 일었고 이 시를 연구하여 학위를 한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시인들을 비롯한 문학가들은 물론 역사학자, 사회학자, 윤리학자, 철학자, 심지어 신학자들까지도 이 시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그 속에 스며있는 윤동주의 시상을 캐보려고 야단법석이지만 정곡을 찔러 말한 이는 없는 것 같다. 윤동주는 그 양심으로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함축적으로 이야기 하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공맹의 논리나 진배없는 부끄러움 곧 염치에 대해서 말한 것 뿐이다. 그는 부끄러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해결방법은 무엇인지 말 할 수 없는 범인에 불과한 것이다.
하기는 그가 "십자가"란 시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나에게도 십자가가 / 허락된다면 / 꽃처럼 피어나는 피로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라고 해 아! 그가 조금만 더 예수께 다가섰더라면 부끄러움의 실체를 알았을 터인데 하는 진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는 그의 시 '십자가'에서 다만 예수를 빙자하여 일제 치하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어두운 시대의 속죄양이 되어 시대를 밝히고자 하는 우국충정의 시를 썼을 뿐이다.
정신 분석학에서는 부끄러움의 심리적 기원을 "내가 바라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괴리감에서 발생하며, 존재가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로부터 한참을 벗어난 현실적 삶의 양태, 그 둘 사이의 괴리감과 거리감에서 부끄러움은 시작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의 기원에 거의 다가선것 같지만 진실은 아니다. 인간의 부끄러움은 전적으로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때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최초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창2:25) 왜 부끄러움이 없었을까? 그들이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짓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죄의 결과 중에 하나이다. 이후 인간은 그 누구나 부끄러움은 죄의 결과라고까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부끄러움은 수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고 살지만 인간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역사요, 개개인의 삶도 부끄러움의 연속인 것이다.
윤동주나 마하트마 간디나 공자나 맹자가 부끄럽지 않는 생을 살기위해 절치부심한 것은 높히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 부끄러움이란 그림자를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으므로만 이 부끄러움은 가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