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안다'는 것은 삶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불편하게 될 수도 있고 편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비참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영광스러운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안다'는 말을 좀 더 학문적으로 접근해 본다면 이것을 '지식(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육이나 학습, 혹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고 재활용될 수 있는 정보나 기술을 말합니다.
B. F.넬러(B.F. Kneller) 라고 하는 분이 '지식'을 몇 가지로 정의한 것을 보았습니다.
'계시적 지식, 이성적 지식, 경험적 지식, 감각적 지식, 권위적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계시적 지식은 가장 근본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혹은 영감으로 주시는 지식입니다. 이성적 지식은 철학적 지식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가진 사고력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비판하고 추리하고 종합해서 얻는 것입니다. 경험적 지식은 살아가면서 체득적으로 얻는 지식입니다. 실수와 실패, 좌절을 경험하면서 얻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지식은 감각적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등한 동물들에게 부여된 지식 습득 방법입니다. 인간은 교육이나 학습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지만, 동물들은 그럴 수 없으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부여 받고 나오는 지식입니다. 권위적 지식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절대적인 권위 앞에 내가 알고 습득한 다양한 지식과 반하고 이치에 맞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 다양한 지식적 수준들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중에 후자의 두 가지 지식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계시적인 지식을 갖고, 이성적 판단을 하고, 다양한 삶의 체험들을 통해 훌륭한 지성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알고 있는 지식이 삶에 녹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예로 들어 봅니다. 처음에 운전을 배울 때는 책을 보기도 하고 직접 차에 올라 운전을 경험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운전을 배우고 면허증도 얻었습니다. 초기 운전을 할 때는 교통법규도 생각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럴 것이다. 저런 상황에서는 저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를 예감하며 운전합니다. 그러나 운전이 익숙해지면 신호를 습관적으로 감각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지키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법리적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감각적으로 운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씀을 들어 계시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학교나 공동체에서 배워 습득된 지식이 있다고 해도 늘 이성적으로 따지고 계산을 한 후 행동을 하다 보면 '안다는 것'에 '순종'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유익이 내게 있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은 어떨까? 등등 말입니다. 결국, 시도하기보다 아는 걸로 끝나고 말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순종을 감각적으로 하게 되면 즐거움이 있습니다. 편안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수긍이 되지 않아도 권위적 지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혹은 부모님이나 존경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르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면 분명 나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엄청난 유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감각적 지식과 권위적 지식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지식이든 그렇습니다만 한 번 두 번 보고 듣는 교육적 습득이나 경험적 습득보다 더 오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좋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기까지 훈련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해봐서는 이 두 지식이 주는 유익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지식적 영향에 움직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건 없이, 당연한 듯 웃으며 순종하고 계십니까? @ki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