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종교 즉 기독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 중 강력한 선교를 하는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일찍이 우리는 이슬람 선교 전략이 “한 손에 코란, 한손에 칼”이라고 들어 왔다. 이는 이슬람의 선교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것을 예시한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받고 무슬림이 되든지, 아니면 칼을 맞아 죽든지 양자택일 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슬람은 아랍 족들에게만 이 방법을 썼을 뿐, 이민족에게는 칼로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는 초기교회부터 강력한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다음으로 이방민족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선포하였다.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의 행적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선교는 전도자들의 피 흘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선교가 야만인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그 방법이 폭력적 양상을 띠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크족 왕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야만 게르만족을 교화 시키면서 세례 받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하는 무서운 법을 시행했다. 그야말로 “한손에 성경, 한 손에 칼이었다.” 이런 선교 방법이 장기간 그리고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야만인들을 교화 시키는 방법은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한 동안 이어졌을 뿐이다.
한국에 천주교회가 전래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택한 선교 방법은 물론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양 천주교회 역사에 있었던 전통이 가끔 엿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남연군묘소도굴사건’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黃嗣永)은 조정의 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의 어느 옹기장이 토굴 속에 숨어 난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조선 조정이 천주교에 전교의 자유를 허락 할 수 있는 방책을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로 보냈다. 폭 62Cm, 길이 38Cm의 조그마한 흰 비단에 가는 붓으로 장장 1만 3천 자에 이르는 놀라운 양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비단에 쓰였기 때문에 ‘백서’(帛書)라 일컫는다.
이 백서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서양 나라의 군함 수백 척과 강한 군사 5, 6만으로 대포, 군물(軍物) 등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하라는 대목이다. 즉 군사력으로 조선 조정을 협박하여 전교의 자유를 얻으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편지 말미에 “…비록 이 나라는 전멸한들 성교(聖敎)의 겉모양에 해로울 것이 없다.”……(雖殄滅此邦 亦無害於聖敎之表樣云云)라 썼다. “이 나라가 진멸(殄滅)해도…”라는 말은 한 나라의 백성으로 도저히 쓸 수 없는 배역무도의 말로, 만고의 역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편지가 사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1801년, 대역모반의 죄를 쓰고 몸이 여섯 조각으로 절단되는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며, 그 모친은 거제도에, 처는 제주도에, 자녀들은 추자도에 유배되는 등 그의 혈족 모두가 참혹하게 몰락했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일어난 지 약 두 세대가 지난 후인 1865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힘에 의한 선교에 연연하고 있다는 확증을 보여준 사건으로, 소위 남연군(南延君)묘소도굴(盜掘)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가톨릭교회가 전교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회라는 오명을 쓰기에 충분했다.
조선에 밀입국하여 전교하던 불란서 신부 페롱(S.Feron)은 박해를 피해 간신히 상해로 피신하였다. 페롱은 조선에 전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방책하나를 구상했다. 그것은 당시 국왕 고종의 친부(親父)로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에 모진 박해를 가하던 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능을 파헤쳐 유골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이 유골을 담보로 대원군과 협상을 벌려, 부친의 유골을 찾아 가려면 천주교에 전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라는 요구를 한다는 것이었다.
페롱은 유태계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와 의기투합하여 1868년 5월, 두척의 배에 조선인 몇 명과 잡역꾼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해를 출발하였다. 그들은 남연군의 묘가 있는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산에 당도하였다. 중국에서 가져온 공구들로 철저히 관리되어 있는 묘를 파헤치기 시작한 지 10여 시간 만에 관이 있는 데까지 파 내려갔다. 그러나 날이 새고 동리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다, 썰물 때가 되어 배가 빠져 나갈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중지하고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귀로에 하리후포에서 백성들의 집을 습격하여 물건을 빼앗고 횡포를 부린 후 퇴각했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 묘가 훼손된 것이 발견되었고, 이는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 일에 천주교인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대원군에게 알려졌을 때 그의 참담한 모습과 분기탱천(憤氣撑天)함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조상숭배를 극히 귀하게 여겼던 우리 겨레의 전통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음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한 나라 군왕의 조상 묘를 훼파하고 모독한 일로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야만적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일로 천주교가 야만의 잡교라는 것이 입증되었고, 천주교도에 대한 참혹한 살인극이 재연되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 미숙과 사려 깊지 못한 행위가 수많은 그리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불행과 고통을 안겨 주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백서와 남연군묘소도굴, 이 두 사건은 가톨릭교회의 선교 방법론을 가늠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교회 역사에서 가톨릭교회가 물리적 힘을 동원하여 선교하는 방법을 택해 온 것이 사실이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은 물리적 힘을 동원해도 좋다는 사상은 위험천만하다.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남연군 묘소도굴사건은, 선교는 윤리적이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는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