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량
(Photo : 기독일보) 정인량 목사

독일 사람들이 베토벤과 모짜르트중 누구를 더 선호할까를 생각한다면 볼프강 아메데우스 모짜르트를 손꼽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은 독일의 전형적인 음습 날씨를 그대로 악보에 담아냈다면 모짜르트는 독일의 일기를 재해석하여 명랑하고 유쾌함이 가득찬 천상의 정원으로 잘 가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아메데우스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예컨대 한국인 중에 모짜르트 해석학의 권위자를 손꼽으라 한다면 의외로 전문직 의사들 중에 몇몇이 거론되는 것처럼 서양인들 특히 독일인 가운데는 단연코 신정통주의 선구자인 칼발트를 첫번째로 들 수 있다. 그의 모짜르트에 대한 이해가 그 어떤 유명하다는 고전음악 평론가들도 쫓아 올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던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모짜르트의 음악을 애호했는지 그의 책상위에는 그가 평생 존경했던 칼빈과 모짜르트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천국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가 아닌 때에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즐긴다고 했으며, 자기가 죽어서도 듣고 싶은 음악이 모짜르트의 음악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가 그토록 아마데우스를 즐겨 들었다는 것은 추측건대 무슨 음악적 조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다는 그의 순탄치 않으 인생여정이 모짜르트와 많이 닮음에서 시작된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만큼 모짜르트의 음악보다 먼저 모짜르트라는 천재 인간에 깊이 함몰되었던 것이다.

그가 모차르트를 그토록 좋아하고 또 그토록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모짜르트의 자유 "란 글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적인 중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균형과 조화의 절묘한 전복, 일종의 전환입니다. 이 전환 속에서 빛은 증가하고 그림자는 사라지지는 않지만 줄어듭니다. 기쁨이 슬픔을 없애버리지는 않지만 능가합니다. 긍정이 -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 부정보다 강렬하게 울려퍼집니다. 모차르트의 삶이 겪은 중대하고 어두운 체험들과 작고 밝은 체험들 사이의 관계가 전도되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힘의 균형, 말하자면 불확실성과 우유부단함을 결코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토록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하는 '키리에'나 '미세레레'도 그 곡에서 탄원하는 자비가 오래 전에 베풀어졌다는 굳은 신뢰에 의해 지탱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모차르트의 곡에서 그분은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모차르트에게 그 기도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취된 청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교회음악은, 흔히 내세워지는 온갖 주장과는 달리, 참으로 영적인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결코 한탄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처지는 그러고도 남을 형편이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듣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상쾌하고 멋진 전환을 이루어 냈습니다. 감히 말하거니와, 바로 이것이 모차르트의 자유의 비밀이요, 우리가 처음에 물었던 그의 특별함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칼발트가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를 자주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명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지크"를 잘츠부르크의 한적한 거리 카페에서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