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장미(a blue rose)’를 본적이 있는지? 그 꽃말은 ‘불가능한 것’, ‘가질 수 없는 것’,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파란 장미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그것을 만드는데 거듭 실패했다. 그 꽃말이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붙여진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다가 일본의 주류회사 산토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회사 플로리진과 13년간 공동 연구 끝에 유전자를 조작해 파란 장미를 만들었다. 그 일본 기업은 피튜니아, 팬지 같은 파란 꽃에서 파란색을 내는 색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끄집어내 장미에다 집어넣는 실험을 수차례 하여 결국 파란 장미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자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수천 곳 실험실에서는 한숨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제껏 기울였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파란 장미를 만들어 낸 일본 기업이 수년간 쏟아 부은 돈은 무려 30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세계 수천 곳의 실험실에서 파란 장미를 만들고자 쏟아 부은 돈을 모두 합하면 그 금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엄청난 자금과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을 쏟아 부을 만큼 파란 장미는 가치가 있는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과학자들의 실험 정신을 무시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 정신이 인류 역사의 진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파란 장미를 만든 그 일본 기업은 결국 돈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있다. 파란 장미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그 돈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치의 병과 조류인플루엔자와 같은 전염병 치료약 개발에 투자한다면, 후진국에 학교와 병원을 건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전 세계에서 매일 기아로 사망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1만 8천명에 이르고 있고, 오염된 물과 수인성 질병으로 죽는 아이들이 하루에 5천명에 이른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사람의 눈요깃감으로 만든 파란 장미 한송이보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은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위기에 대응하는 연구도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뒤로 밀리는 게 현실이다. 이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서 필자가 지닌 생각이 순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인간이란 돈이 없으면 돈이, 집이 없으면 집이, 성적 대상이 없으면 그 대상이 모든 고민을 해소해 주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더욱 더 집착하는 탐욕의 화신이 되는 청맹과니다.
욕망과 비움 사이에 선 존재
영성가이자 인문학자인 조현은 그의 책 《그리스인생학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가. 누군가는 욕망을 키우고 키워 하늘까지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데 이와 반대로 누군가는 세속적 욕망을 포기한 채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낸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엄명조차 인간 안에 요동치는 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그리스 신화에도 나온다. ‘판도라 상자’로 유명한 판도라는 제우스의 계략에 의해 창조됐다. 아름다운 외모와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던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지 말라는 신적(神的)인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여는 바람에 그 상자에서 인류의 운명이 될 모든 죄악과 재앙이 튀어나왔다. 욕망에 의해 추동된 호기심이 가져온 재앙이었다. 계시록의 저자는 종말론적 현상의 하나로 사람의 영혼조차 매매 대상이 되는 현실을 예로 들면서 개탄하였다(계 18:13). 돈이 사람들의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주인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 공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맘몬과 벗한 거대한 욕망의 구렁이가 문제다.
우리 사회는 욕망과 비움 사이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아니, 욕망과 절제의 조화와 균형이 무너져 온갖 욕망의 노예로 정신적, 영적 불구가 되어 가고 있다. 성적 호기심으로 촉발된 욕망으로 인해 열지 말아야 할 동성애 상자를 열었고, 신적 영역에 도전하듯 하나님이 만드신 유전자를 맘대로 조작하기도 하고,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듯 자신이 선과 악을 임의로 결정하는 주체인듯 교만하게 굴기도 한다. 그 결과는 우리 모든 인류가 앞으로 떠맡게 될 것이다.
미국의 존경받는 컴퓨터 공학자 빌 조이는 2000년에, 우리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생명공학, 정보기술과 같은 과학기술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이다. 단순히 경고성 멘트라기보다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온갖 화려한 기술 문명이 이 땅에 건설되고 있을 때, 정신 문화와 영성과 삶의 질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
욕망의 세상에서 현실적 영성으로 살아가기
잠언 30장에서 아굴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현실적 영성으로 아로새겨진 기도문이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나에게서 멀리 하옵소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
얼마나 간단명료하면서도 실제적인 기도인가? 아굴은 허위에 빠지거나 거짓을 일삼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를 삶의 근본으로 삼는 지혜자에게는 거짓과 허위는 멀리 피해야 할 독소(毒素)가 아니던가? 아굴은 또한 결코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않고서 자신을 지킬 내적인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재산이 과불급(過不及)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물질에 초연(超然)한 듯 말하지만, 뒤돌아서서는 구린내 나는 돈까지 챙기려고 안달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물을 일이다. 아굴이 적절한 재물을 하나님께 요청한 것도 실제로는 경건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기위한 현실적인 기도였다. 현실과의 타협이 아닌, 현실적 영성(靈性)과 경건이 묻어나는 기도가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란 장미가 아니라, 우리 안 경건의 밭에서 자라는 정결하고 소담한 영혼의 장미 한 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