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은 70절이 넘는 긴 장이다. 그러나 이 6장은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않으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흡수할 수 없기에, 한번에 읽고 공부할 것을 권한다.
6장에는 두 가지의 기적을 베푸신 것이 나온다. 첫째는 오병이어 사건이고, 또 한 가지는 주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표적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 요지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제자들도 수군거렸다. 나 또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염려가 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다. 받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이 요한복음 6장은 요한복음, 아니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들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6장에서 주님은 갈릴리로 다시 오셨고,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 올라가셨다. 당시 38년 된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기적을 행했다는 장본인인 예수님께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다(2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다(4절). 그리스도께서 그 역사를 명절에 맞추신 것을 요한복음 6-7장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유월절의 실제이시고, 초막절도 실제이시기 때문이다. 유월절 양은 다른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그 절기에 양의 고기를 구워먹어야 하는 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의 살을 먹어야 하는 문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그 큰 무리를 바라보시면서 그들이 배고픈 것을 아시고 그들을 먹일 준비를 하셨다(5-6절). 여기서 주님은 빌립을 시험코자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신 적이 있으시다(창22:1). 이 구절들은 야고보서 1장 13절과 대치되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위의 시험은 그야말로 시험(test)이고 야고보서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실 수 있다. 왜 시험하시나? 그것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을 교육시키는 가장 뛰어난 방법은 먼저 묻고 해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인상적인 배움이 적다는 말이다. 사람의 한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빌립의 대답이 전부다. 주 예수님은 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무언가를 하실 것을 아셨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에게 먼저 물으셨던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안드레라는 제자는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제자들마다 성격이 다르다. 안드레는 주로 행동파다운 사람이었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놀랍게도 주님은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무리를 앉히라고 하셨다.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해 8천-1만명이 그것을 보고 다 앉았다는 것도 기적적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눠주셨다. 계속 나눠줘도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약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없이도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헌신과 조금 드리는 것을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원칙을 보여주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족하지만 주님을 위해 드려보라.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끼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양식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영의 양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기묘한 존재로, 하늘 양식을 먹어야 하는 존재이다(마 4:4). 우리가 영의 양식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목마름을 느끼게 된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른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6장의 디베랴 바다 건너편의 군중은 배고픈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기독교는 뭔가 지식을 많이 얻고 또 무슨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라면 먹는 종교이다. 속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람마다 죄의 문제가 있고 정죄가 있는 것은 내적인 문제요 영적인 문제다. 이런 문제는 물질적인 음식으로 해결이 안 된다. 정신적인 노력으로도 안 된다. 영의 음료로만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주님은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셨다. 사람마다 안의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어야 채워진다. 영의 양식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말씀의 공급이지만, 이는 매우 실제적인 공급이요 충족함이다.
두 가지 기적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셨다. 또 ‘하나님의 일?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주님은 먹는 문제를 가르치시기 위해, 표적들을 사용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다.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한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을 영적 세계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율법의 교육을 받아 자란 민족이다. 그런 자들의 관념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거다.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고 무언가 선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3장에서 니고데모의 질문도 본질상 비슷했다. 6장은 사람의 관념을 완전히 깨는 장이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역량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의 문제가 거기서 발생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 데 앞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일이다.
이후 예수님은 참 믿음에 대해 소개하신다. 1-5장에서도 믿음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6장에서는 믿음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배부르며 음료를 먹고 목마름이 해결되듯,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어 배부름을 얻는 것이다. 이 영적 진리를 설명하시려 먼저 육신적으로 배고픈 그들을 먹이는 시범을 보이셨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다. 곧 음식을 먹듯 우리 속에 받아들여 영양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혈액 속 모든 건강의 요소가 되고 힘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속의 성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회는 일차적으로 먹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하나의 잔치로 비유하셨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놓고 먹으러 오라는 것이다. 먹는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주관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결국 믿음이란 예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이다. 사람들이 먹을 떡이 있게 됐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먹을 음식과 마실 음료로 오셨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 것이 정상인가? ‘나는 만족해. 나는 충분히 먹어 부족함이 없어.’ 이러한 만족함과 기쁨과 상쾌함이 있어야 한다. ‘내 피는 참된 음료이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했다. 마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쾌하게 한다. 먹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만족을 주고 힘을 준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알아야 하지만 그 공부하는 것이 모두가 아니다. 아는 것도 먹기 위함이다. 식욕은 건강한 사람에게 있다. 몸이 너무 약해지면 식욕이 없어진다. 건강한 사람만이 음식 맛을 알고 밥을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