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Photo : ) 권혁승 교수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1-4)

위기를 겪은 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애굽을 떠나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그는 애굽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네게브(남방) 지역을 거쳐 곧바로 벧엘로 직행하였다.

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벧엘로 직행하였을까? 벧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처음 단을 쌓았던, 영적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실향민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음으로 새로운 영적 고향을 만든 것이다. 고향이란 생명이 부모와의 만남 속에서 탄생되고 부모의 보호 아래 성장한 곳이다. 고향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으로 인하여 의미화된 땅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벧엘은 아브라함이 새로운 삶과 신앙을 출발하였던 영적 고향이다.

고향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의 지향점이다. 연어가 태평양 바다를 가로질러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오는 것이나, 명절에 극심한 교통체증에도 불구하고 귀성인파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모두 귀소본능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실패를 경험한 후 벧엘로 직행한 것은 영적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향의 정겨운 모습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고향이 있으면 즐거움과 행복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고향의 따뜻한 추억이 고단한 삶에 말 없는 위로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분단의 아픔을 안고 남한에 내려와 살고 있는 실향민들의 가슴 한복판에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한과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고향 상실의 상처가 큰 것이다.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랑생활을 하며 지내던 유대인들, 그들의 삶과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그들을 지탱시켜준 힘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 곧 포기하지 않은 고향에 대한 꿈이었다. 가나안은 그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주면서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 영적 고향이었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모이면 귀향을 꿈꾸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민족의 회복을 기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 마지막 순서의 기도인데, 그 내용은 '이 기도를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드리게 하여 주소서!'이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고향은 하나님나라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의 인생 여정을 마치면, 주님과 함께 안식할 영원한 고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장막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바라보았다. 사도 바울 역시 영광과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그날을 소망하며 믿음을 굳게 지켰다(딤후 4:8).

비록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하늘나라이지만, 지금 여기에도 우리의 영적 고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던 곳,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과 소명을 경험한 곳,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의 응답이 주어진 곳, 그리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지는 곳, 그런 특별한 의미가 간직된 곳이 우리의 영적 고향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다메섹 도상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세 차례의 전도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 대중들 앞에서 증언할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바울은 다른 말 하지 않고 25년 전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자신의 회심 경험을 상세하게 간증하였다(행 22:2-21). 그렇듯이 영적 고향은 아무리 오래 전의 것이라도 마지막까지 생생하게 살아있어 전체를 이끌어가는 삶의 원동력이다.

하나님께 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교회 역시 영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생명이 탄생하여 성장한 곳이 우리의 고향인 것처럼, 교회도 중생한 생명이 말씀과 교제를 통하여 성장하는 거룩한 곳이다. 영적 고향을 소유한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곳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성장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를 제목으로 한 수필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