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 사령탑을 맡았던 최강희 전 국가대표 감독. 브라질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한 게임 한 게임 진행되는 동안 마음 고생이 참 많았다. 나도 목회를 하다 보니 지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지를 잘 알고 있다. 한 게임 한 게임이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본선행 티켓을 움켜잡기는 했다. 그러나 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비난과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만족할 수 없는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휘봉을 잡은 자로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
그런데 최근 SNS 글로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기성용 선수가 자신의 SNS에 최강희 감독을 향한 비난과 조롱이 섞인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최강희 감독의 말이 그의 감정을 자극시켰다. "셀틱 빼면 그게 내셔널리그지." 기성용은 화가 났다. 자신이 뛰고 있는 스코틀랜드리그를 폄훼했기 때문에. 그래서 불만을 SNS으로 표출했다.
"쿠웨이트전은 나랑 (박)주영이 형의 독박무대가 되겠군."
"잘하면 본전 못하면 아주 씹어드시겠네."
"소집 전부터 갈구더니 이제는 못하기만을 바라겠네."
"님아, 재밌겠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글들을 올렸다. 쿠웨이트전에서 2대 0으로 승리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전반부터 나가지 못해 정말 충격 먹고 실망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느꼈을 것."
"우리를 건들지 말았어야 했고, 다음부턴 그 오만한 모습 보이지 않길 바란다."
"그러다 다친다."
그 동안은 숨겨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지 않은가? 그가 한 막말은 급물살을 타고 사람들 사이로 번져갔다.
다음날 기성용 선수는 에이전트를 통해 사과문을 전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KFA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다. 아들의 부주의한 감정 표현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건 해명과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목소리들이 일고 있다.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무례한 행동에 응당한 징계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과로만 끝나고 만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사건이 또 터질 것이라는 우려가 깊다. 결국 기성용 선수를 징계하는 건 피하기가 어려울 듯싶다. 그러면 월드컵 전력에도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닐까?
이번 사건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요즘은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까지 SNS 급물살에 휩쓸리고 있다.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잘 활용만 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적지 않다. 이것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적인 안전장치를 좀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비공개로 운영돼온 기성용 페이스북에 대한 언론의 폭로가 과연 정당한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비공식 계정을 공개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앞으로 단속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상식 밖의 일들이 세상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자기방어가 필요하다.
이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합리한 처사가 아닌가? 옳은 지적이다.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나눈 밀담도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빚을 파장도 생각해 봐야 한다. 나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사람이나 공공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속상하다고 마음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요지경이 될 것이다.
더구나 기성용 선수는 공인의 자리에 있지 않은가? 공인으로서의 품격을 지켜주어야 한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속상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차원에서 공인의 품격 관리에 대한 대안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이건 구태여 연예인이나 정치인, 스포츠 인사에게 국한시킬 일은 아니다. 목회자인 나부터 점검해야 할 문제다. 교회의 영적 지도급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된다. 우리 스스로가 품격관리를 점검하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받는 지탄과 불신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가 없다. 영적 지도자들의 품격관리를 위한 교육프로그램과 제도적인 장치까지도 필요하지 않을까?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고?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당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괴로운 일이다. 억울하고 분해서 울분이 치솟는다. 하지만 욕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게 보편화되어야 할 사회 현상은 아니다. 자제되어야 할 일이다. 순화해야 할 일이다. 금해야 할 사회 풍토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와 아픔을 확대재생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행동이 바로 인격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다 보고 계신다.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지 않더라도, 감시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더라도,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다윗은 한때 사람의 눈만 의식하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서 부하의 아내를 취했다. 그 실수로 큰 낭패를 당했다.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사람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다윗이 그랬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다. 보디발의 아내가 집요하게 유혹할 때, 인간 주인을 의식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처신했다. 옳았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다. 아름다운 사회,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랏님 욕하는 것을 절제하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
이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를 화두에 올려 즐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근성도 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가 없는 곳에서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면 싫지 않은가? 아니 보복하고 싶은 마음까지 치밀지 않는가? 그런데 왜 자기 스스로에게는 적용하려 않을까?
인간의 죄성을 어쩔 수 없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자꾸 되새겨 보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전에 '나는 안 그런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자. 그래서 '나는 완벽해'라는 판단이 되면 그때서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입에 올리자. 아름다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