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로 태어났지만 나중에 유명한 노예제 폐지론자가 된 프레드릭 더글러스(1818~1895)다.
지난 19일 워싱턴 DC 연방의사당에서는 프레드릭 더글러스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연방의사당에 세워진 동상 중 흑인으로는 4번째다.
의사당에는 흑인인권운동의 아버지인 마틴 루터 킹 목사, 1955년 12월 알라바마에서 백인전용 버스 좌석에 앉아 있다가 흑인 자리로 가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흑인인권운동을 가져온 로자 파크, 1826년 재판에서 백인 남자를 상대로 최초로 승소한 흑인 여성인 소우저너 트루스의 동상이 먼저 세워져 있다.
이날 제막식에는 조 바이든 부통령,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메코넬 공화당 상원원내 대표 등 양당 리더급 의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프레드릭은 1818년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8살이 되던 해 프레드릭은 주인의 부인에게 글 읽는 법을 배웠고 쓰는 법은 볼티모어 조선소에서 독학으로 익혔다. 볼티모에서의 노예생활은 대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굶주림에 덜 시달릴수 있고 편한 편이었지만 노예이기 때문에 배움은 금지였다.
1833년 프레드릭은 예전에 태어난 농장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노예들을 채택으로 다스리는 감독자와 싸우고는 탈출을 시도했다. 첫번째 탈출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볼티모어의 다른 주인 밑에서 배수리공으로 일하다 1838년 두번째 탈출 시도를 해 성공한다. 프레드릭은 뉴욕으로 도망가 이름을 프레드릭 베일리에서 프레드릭 더글라스로 개명한다.
그가 흑인 뿐 아니라 여성을 위한 자유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매사추세츠에서 개최된 노예제 폐지대회에서 즉흥연설을 하면서부터다. 연설에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던 프레드릭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창설한 노예제폐지협회에서 일을 시작한다.
1845년 노예제폐지협회는 그의 자서전인 ‘미국인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삶의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를 출간한다. 이 자서전은 출간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과 세계 각지에서 읽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서전의 출판으로 그의 진짜 신분이 드러나자 도망노예에 대한 체포를 피하기 위해 프레드릭은 몇 년간 영국으로 건너가 지내게 된다.
이때 프레더릭이 영국에서 만난 두 친구가 1846년 프레더릭이 노예 신분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700불이 넘는 돈을 주고 그를 자유의 신분이 되게 해주었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온 프레드릭은 ‘The North Star’ 신문 창간을 시작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최선봉에서 활약했다.
더글러스의 가장 유명한 연설로 꼽히는 어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가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운동을 비난하는 자는 밭도 갈지 않고 수확만을 바라는 자, 천둥번개없이 비가 내기리를 바란자, 폭풍우없이 잠잠한 바다를 바라는 자와 같다”
남북전쟁이 시작되고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프레더릭 더글라스에게 노예 해방에 관한 연설을 요청한다. 그는 이에 더해 흑인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고, 많은 흑인들이 북부군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정치 참여는 링컨 대통령 뿐만이 아니라 이후 연이어 5대 미국 대통령의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이날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최악의 상황에서 태어났다”며 “하지만 그는 자신을 노예로 만든 국가를 비난하는 대신 다른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프레드릭의 동상 밑에는 그가 1857년 뉴욕에서 한 연설의 한 문장인 “투쟁 없이 발전은 없다”(Without struggle, there is no progress)’가 새겨져 있다.
- Rachel Kim contributed to this article.
<케이아메리칸포스트, www.kameric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