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4:19 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는 말씀이 있다.
여인의 고통중에 아이 낳는 분만의 고통 만큼 큰 것이 없다고 한다.
바울사도는 전도하여 교인된 이를 '자녀'라고 부르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 될 때까지 다시 해산하는
산모의 고통을 겪어야 겠다고 한다.
감옥에 있을 때도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한다.
삶도 죽음도 유익하다는 산모의 마음을 가졌다.
목회자가 진정 아파해야 할 고통이 무엇일까?
교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이 말은 듣기 좋고, 하기도 편해 강단에서, 혹은 교인들 사이에 흔히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성해야 겠다.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나, 의례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면 낯 간지럽지 않은가 ...
말은 안해도 비웃고 있다.
그러니
목회자는 맡겨주신 교인들이 거듭나는 체험을 가지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해산하는 고통을 견뎌내다보면 어느날 인가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고백을 눈물 흘리며 하는 성도가 태어난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내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주님이 날 주장하시니 그리스도로 始發된 삶을 산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되어 의와 경건과 믿음으로 산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과거의 일이기에 옛 사람의 죽음도 이젠 완전히 과거일이다.
'뒤시아 지오'
'산 제사'는 '살아있는 희생'이다.
생명이 있는 채로 드리는 제사이니 살아서 죽어지는 제사이다.
이렇게
영원을 호흡하며 사는 자녀가 태어 나도록 해산의 고통을 격은 사역자는 바울 같은 목회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