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의 학문이란 유학(儒學)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공맹(孔孟)의 사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문이며 그 이상의 어떤 학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 조선조 말기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유학은 그 본래의 정신과는 달리 공허한 이론적 논쟁에 빠져 쓸데없는 파당을 만들었고 이 파당은 국력을 소진시켜 결국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참혹한 재난을 겪는 비극을 겪는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국난을 겪으면서 일부 유학자들 간에 자기를 돌아보고 국가의 힘을 기르는 방도를 찾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재래적인 공맹의 사상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정신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런 새로운 학문과 정신은 결국 서구의 그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서구의 기술 문명에 접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선에서는 매년 중국에 사절단들을 여러 차례 보냈는데 이 때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사절단에 섞여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면 학문적 호기심으로 그곳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서양 선교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였고, 그들로부터 선진된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접하고 학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식을 얻었고, 천문, 지리, 수학, 과학, 산업과 더불어 세계지도, 천리경(만원경), 자명종, 악기, 포도주 등을 입수하였다.
이들 중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에서 예수회 소속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였고, 정두원은 1631년(인조 9년) 명나라에 진주사(陣奏使)로 북경으로 가던 중 등주(登州)에서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로드리케즈(J.Rodriquez)를 만난다. 정두원은 그로부터 홍이포(紅夷砲)의 제작 방법과 천문, 역학, 지리에 관한 서적을 많이 받았고, 이듬해 귀국할 때는 천리경, 자명종,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천문도(天文圖), 홍이포제본(洪夷咆題本:대포) 등의 서적을 갖고 돌아왔다. 특히 그는 홍이포를 국내에 반입하여 국왕 인조와 백관이 임석한 곳에서 시험 발사 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서양 무기의 위력을 체득하게 하였다. 이 때 천주교 서적도 일부 반입되었으나 반포되지 못하고 궁궐 창고에 사장되고 말았다.
일부 학자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고 있었을 때에 과학 서적과 서구에 대한 학문을 탐구하던 사람들 중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소장파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이 벽(李蘗), 이승훈(李承薰) 등이 있었다. 이들 중 권철신, 정약전, 이 벽 등이 주축이 되어 서학의 교리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여기에 새롭고 바람직한 사회건설과 윤리 체계의 틀이 있다고 판단하고 거기에 기록된 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77년(정조 원년) 겨울, 이들은 서울 동쪽, 지금 양주군 마현(馬峴) 근처에 있는 앵자산 사찰이었던 주어사(走魚寺), 천진암(天眞唵)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교리서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주일을 준수하여 노동을 금하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리며, 육식을 금하는 날을 정하는 등 그들이 지킬 수 있는 계율들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초기 유학자들에 의해 수용된 천주교회는 현실 사회와 정치제도에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학구적 연구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는 그 학자들이 관직에 등용되거나 축출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치 상황과 연결되어,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1783년(정조 7년)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壯官)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서학을 연구하던 이들이 이승훈을 동지사 일행에 딸려 보내 중국으로부터 서학 서적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그곳의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하면서 서양의 여러 학문에 접하고 연구를 하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교리 강습도 받았다. 이승훈은 교리 강습을 받는 동안 이 교리야말로 참 진리라 확신하고 귀국할 무렵인 1784년 2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후 북경에 있는 북성당에서 예수회 소속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으로부터 영세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로 천주교인이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승훈은 1756년(영조 32년) 강원도 평창(平昌)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 재주가 널리 알려졌고 20세 전후에 그 학식과 명성이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25세 때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택 현감(懸監)을 지냈다. 그는 정약용의 매제이고 이 벽과는 사돈 관계였다. 이승훈의 수세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여러 천주교 선교사들에게 일대 뉴스가 되었고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승훈은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영세 명을 받고 다음 달에 여러 권의 교리서,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등 천주교 관계 물품들을 갖고 귀국하여 기다리던 서학파의 환영을 받는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교(傳敎)한 결과로 신자를 얻는 일반적 형태와는 달리, 국외에서 신부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영세를 받는 구도(求道)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승훈이 영세를 받은 해인 1784년은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 알렌 (Horace N. Allen, M.D.)이 입국한 1884년에서 정확히 100년 전으로, 개신교보다 1세기를 앞선 교회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