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가 한 말로 도덕을 실천하는자, 옳은 길을 가는자는 외롭고 고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가는 길에 반드시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 줄 좋은 친구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말을 어느날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한 고을 사또가 과거를 보러 갈 시간이 부족한 것을 알고 허준에게 말 한필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덕을 행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위로와 권면을 해주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사또가 허준에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내과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도중 어느 주막에 다른 의원들과 함께 묶고 있는데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어느 환자의 가족이 환자를 치료할 의원을 찾으려 할때 아무도 나서지 아니하였지만 허준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서 밤새 아픈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인근각처에 있는 병자들이 허준에게 몰려와 치료를 간절히 원하자 그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야 하는 날짜를 늦추고 수일을 더 아픈 환자들을 돌 보았다. 그런데 그에게 난관이 주어지는데 날라가도 쉽지 아니하는 과거 길 에서 말 도둑으로 오인을 받아 감옥에 묶게되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진실은 오래가지 아니하여 밝혀지고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사또가 허준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교통 수단으로 말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가 힘들게 과거 시험장소에 갔었는데 이미 과거 시험을 치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경과 했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시험장에 임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으로 그는 실망하였지만 다시 힘을 얻어 오던길로 다시 돌아가 미처 치유하지 못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와 같이 내과 시험을 보러간 수많은 의사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향해 시험장에 갔을 뿐아니라 내과에 합격한 유의태의원의 아들이 유도지가 허준에게 비굴하게 충고를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큰 일을 앞에 두고 사소한 것에 힘을 소비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을 그냥 두고 가야하는 것, 이 둘 중의 어느 것이 값진 것일까? 묻는다면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둘다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 사랑과 정의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보는 기독교에서는 분명 둘간의 우선 순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누가복음 10:30-37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먼저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일이다. 그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과 산적들이 득실 거리는 위험한 여리고 사이에서 한 유대인이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산적들이 튀어나와 그를 헤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값진 것들을 빼앗았고 그들은 그 유대인의 옷을 벗기고 두들겨 때려 의식을 잃게 했고 피흘린 그를 길 바닦에 두고 가버렸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곳을 따라 내려오다가 길 바닦에서 신음을 하던 강도만난 자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목숨이 강도만난자 처럼 되지 아니할까 두려워 그가 가던 길을 서둘러 간 것이다. 그 이유는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으로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의 통행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보조하는 한 레위인이 었다. 그는 피흘린체 의식을 잃어버린 강도만난 자를 위해 간단한 응급조치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가 거기서 잘못 머물렀다가는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기에 그도 가던길을 계속해서 갔다.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경멸하는 어느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타고 지나가다가 피흘린 강도만난자를 보고 그에게 상처를 씻은 다음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나귀에 싣고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가 그날 밤 강도만나자를 정성으로 돌보와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상처입은 유대인이 다시 여행할때 까지 잘 돌봐주도록 부탁을 한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상종을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도움이 필요한 유대인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베푼것으로 볼때 그는 참으로 휼륭한 덕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사람을 살리고 보는 허준과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면 분명 세상에는 부정하고 부패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와 반면에 선한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두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분해 본다면 그것은 세가지 종류의 부류이다. 첫째는 "네것은 내것이니까 이리 내놔"라는 강도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째는 "내것은 내것이니까 남에게 줄 수 없다."고 여기는 제사장, 레위인과 환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목적이 우선이 되는 내과를 보러간 의원들 같은 사람들이다. 마지막은 "내 것은 네것이니까 나는 내것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환자를 돌본 허준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세상은 강도의 죄목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잘못을 하면 그에 대한 합당한 벌을 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도와 주어야 하는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인 양심의 문제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람의 생명의 가치와 영혼의 소중함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이것을 사랑으로 실현하신 분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랑과 정의에 대해 실존주의 신학자인 폴틸리히는 말하기를 "정의는 모든 것들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요구이며 이 요구를 인정하고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등뼈가 없는 몸"과 같다고 말했다. 폴틸리가 이렇게 말 한 것은 등뼈는 사람의 몸을 지탱해 주는 힘인데 그 힘의 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으로 볼때 그는 정의와 사랑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본 것이다.이 두가지는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해석되어지는 것이지만 성경전체를 놓고 볼때 두가지의 실체는 죄인들을 위해 공의와 정의로 죄를 심판하신 후에 회개를 통해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기 위해 그의 공생애에 정의와 사랑의 실현을 보이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분리 될 수 없고 인간의 사랑과 정의도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할일은 하나님 나라의 덕(德)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곧 이사야 56:1절의 말씀으로"너희는 공평(公平)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라 하였은즉" 이말은 사랑을 위해 공의를 행하는 일은 외롭고 어려운 것 같지만 죄인을 위해 구원하실 주님이 오실때가 가까웠기에 그때까지 덕을 베푸는 선한 삶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반드시 복의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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