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많은 사람들은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의 세속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의 세속화란 로마서 12:2절의 ‘세상을 본 받는 것’ 곧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1928년 국제 선교 대회에서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에 대하여 이슬람이나 힌두교와 같은 타 종교가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를 지적하였다. 교회마다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본받기 때문이란 것이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세상의 더러움 (벧후 2:20)과 세속의 오염 (약 1:27)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이 세상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을 대조하여 말씀하셨는데, 빛의 아들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요일 2:15), 세상을 본 받지 말아야 한다 (롬 12:2). 교회의 머리 (골 1:18)가 되신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요 16:33)’ 예수님께 속한 교회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요일 5:4).
기독교는 교회가 세상으로 향하는 것을 항상 경계했는데, 세속화가 가속되어가는 요즘 경건과 영성에 특히 힘썼던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의 영성을 조명하면서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경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유대 광야의 가장 오래된 파란 수도원으로 가는 길)
유대 광야의 수도원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
285년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안 황제 (Diocletian, 284-305)에 의해 동로마,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가리킨다. 서로마 제국은 5세기에 멸망했지만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토만 터키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존속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의 비잔틴 제국은 640년에 끝났다.
313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과 서로마 제국의 황제 리시니우스 (Licinius)는 밀라노에서 만나 여러 합의 사항과 함께 기독교인을 관대하게 다룰 것에 대한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 밀라노 칙령에 대한 내용은 가이사랴 출신 유세비우스의 교회 역사 (History of the Church)에서 볼 수 있다. 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박해를 견뎌낸 기독교인들은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사막으로 도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지하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 믿음의 박해를 견뎌낸 순교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사막으로, 지하로 숨어들어가기 보다는 성지를 순례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믿음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래서 초기 수도원 운동의 선구자들은 모두 순교자적 신앙을 가진 성지 순례자들이었다.
비록 수도원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각주 1), 교회 역사에서 수도원의 경건과 영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유대 광야의 수도사들이었다.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4세기의 수도원 형성기, 5세기의 수도원 확장기, 5세기 말에서 7세기초까지 수도원의 전성기, 그리고 7세기의 수도원 쇠퇴기이다.
유대 광야에는 두 가지 형태의 수도원이 존재한다. 라우라 수도원 (Laura monastery)과 코노비움 수도원 (Coenobium monastery)이다. 라우라 수도원은 한 사람이 홀로 작은 굴에서 수도 생활하는 자들의 작은 공동체를 말하며, 코노비움 수도원은 공동으로 모여 수도 생활하는 큰 수도원을 말한다. (깊은 골짜기를 접한 절벽에 위치한 파란 수도원의 모습)
라우라 수도원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굴에서 개인의 경건과 영적 유익을 위해 고독하게 지내다가 주말에는 공동으로 모여 기도 (communal prayer)와 예배를 함께 드린 수도원을 말한다. 라우라 수도원에서는 작은 굴에서 수도 생활하는 이들을 위한 물품 (주로 물과 양식)과 영적 필요를 제공하였다. 라우라에 속한 수도사들은 주변으로부터 별 간섭을 받지 않고 주로 영적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라우라 (laura)가 지닌 뜻은 그리스어로 작은 길 (lane)을 의미하는데, 이는 수도사들이 경건 생활하던 작은 굴과 공동 예배를 위한 교회를 연결했던 작은 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적으로 매우 엄격한 자기 훈련을 원하는 사람들이 라우라 수도원에 자원하였다.
유대 광야의 수도원 창시자: 채리톤 (Chariton)
채리톤은 소아시아의 남부 이고니온 (Iconium)의 유력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고니온은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난 후에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현재는 콘야 (Konya)이다. 4세기 초, 기독교의 박해가 끝나자 박해 시대에 살아남은 채리톤은 팔레스틴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채리톤의 자서전에 의하면, 팔레스틴에 도착한 채리톤은 강도에 사로잡혔고 강도들은 그를 유대 광야의 파란 (Pharan)에 위치한 은신처인 굴에 가두었다. 파란은 에인 파라 (Ein Fara) 샘 근처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북동쪽 약 9km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굴에 갇혔던 채리톤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고 채리톤은 그 동굴을 자신의 수도 생활의 처소로 삼았다. 채리톤이 수도 생활했던 이 동굴은 유대 광야의 첫 수도원으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다. 채리톤은 이후에 두 번째 수도원인 두카 수도원을 여리고의 서쪽 카란탈 (Qarantal) 산 절벽에 세웠다. 채리톤의 세 번째 수도원은 수카 수도원으로 올드 라우라 (Old Laura), 또는 채리톤의 수도원으로 불린다. 수카 수도원은 베들레헴의 남동쪽, 드고아의 북동쪽 깊은 골짜기에 세워졌다. (사진의 절벽에서 채리톤이 수도 생활했던 굴들을 볼 수 있다)
채리톤이 성지 순례자로서 유대 광야로 들어온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유대 광야의 수도원 운동과 성지 순례와의 첫 번째 관계를 의미한다. 이후 대부분의 유대 광야 수도사들은 처음에는 성지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여러 지역들을 방문한 후에 유대 광야에 정착하였다. 이런 유형에서 채리톤은 전형적인 유대 광야의 수도사였다.
채리톤이 설립한 세 수도원들의 특징은 수도원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세 수도원들은 모두 샘 근처, 절벽 가까이에 세워졌으며 광야 인접한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곳의 급한 경사면의 작은 경작지는 수도사들에게 필요한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고, 자연적인 동굴은 광야의 거친 기후로부터 쉼터, 사막의 약탈자들로부터는 은신처, 바위에서는 묵상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장소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아 고독과 경건 생활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이런 장소들은 지역 주민들과도 거의 마찰이 생기지 않았다.
330년 채리톤에 의해 처음 파란 수도원이 시작된 이후 유대 광야의 수도원은 5세기 유티미우스 (Euthymius)의 지도 하에 크게 발전하였다. 채리톤이 사망한 약 350년에서 유티미우스가 사망한473년 사이에 유대 광야의 수도원 숫자는 3개에서 15개로 증가하였다. 수도원들은 북쪽 여리고에서 마사다까지 넓게 확장되었다. 이 기간에 사순절 (Lent)을 맞으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광야로 들어가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광야로 들어가는 문화’는 특히 경건하고 존경받는 수도사들이 많이 실천했는데, 이런 문화는 수도원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문화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사막을 친숙하게 여겼고 사막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기간에 유대 광야의 새로운 지역들이 수도원의 적합한 장소들로 결정되었다. 이때에 데옥티스투스 수도원 (Theoctistus monastery), 카스텔리온 수도원 (Castellion monastery), 스펠라이온 수도원 (Spelaion monastery)이 세워졌다. (19세기 말 이후 러시아 정교회 소유인 파란 수도원에서 필자를 안내해 준 수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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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 기독교의 첫 수도사로 이집트 출신 안토니 (251-356)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안토니 이전에 기독교 수도사들은 있었다. 안토니는 하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 (Herakleopolis Magna/ Ihnasiya Umm al-Kimam) 근처 코마 (Coma)에서 부유한 기독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토니가 18살 때에 부모님은 어린 여동생들을 남겨 둔 채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이 사망하고 얼마 후에 안토니는 마태복음 19:21절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안토니는 자신에게 남겨진 전 재산을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여동생들을 기독교 처녀 공동체에 부탁하고 본인은 어느 수도사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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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