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그림자”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걸어 다닐 때마다 뒤에서 슬그머니 쫓아오는 음산한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작정을 하고 달음박질을 시작했습니다. 빨리 도망치면 그림자를 떨구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도 속력을 내어 따라왔습니다. 그림자를 떨궈내기에는 아직 충분한 속력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기 전에 탈진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영불리신”(影不離身)입니다.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문제가 있고 허물이 있으면 근본적으로 고쳐야지,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로 피하든지, 아니면 큰 양산을 쓰는 것이 답입니다. 그림자를 없애려고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교활하고 꾀가 많은 사람은 야곱입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착한 형 “에서”를 역사에 길이 남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도 팔아먹는 멍청이가 되게 한 것입니다.
고령의 연약한 아버지 “이삭”을 아들도 못 알아보는 무능한 늙은이로 만들었습니다. 삼촌 라반은 불쌍한 조카의 임금도 착취하는 파렴치한으로 인식시켰습니다. 야곱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농락을 당했습니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그렇게 이용했으니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은 야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와 눈물을 경험해야 했을까요!
그의 이름 “야곱”은 참으로 잘 지은 이름입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남의 발 뒤꿈치를 잡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인생의 검은 그림자를 떼어 낼 수 없었습니다. 평생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았고, 삼촌 라반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들에게 둘러 싸여 바람 잘 날 없는 고달픈 가정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큰 성공을 쟁취하면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달리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이 달릴 때, 그 “그림자”도 함께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던 차에, 위기의 순간에 만난 얍복강은 야곱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됩니다. 홀로 남은 야곱은 거룩한 천사를 부여잡고 “내 인생을 바꾸어 달라”고 울부짖으며 매어달립니다. 그는 환도뼈가 탈골되는 아픔 속에서도 결코 천사를 놓아 주지 않습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나를 축복하소서!” 짧은 질문과 대답 속에 인생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인생의 실존적인 어두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천사는 제일 먼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의 어두운 인생 그림자가 광명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의 존재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영불리신을 뛰어넘는 신비가 신앙의 깊은 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