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량
(Photo : 기독일보) 정인량 목사

이상과 이중섭은 한국 문단(文壇)과 화단(畫壇)의 요절한 천재 예술가들이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DNA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그들의 꿈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세상을 등졌던 것이다.

 

이상(李箱)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그가 본명을 두고 성씨가 다른 필명을 쓰게 된 연유에서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를 못한다. 그가 문인의 길을 걸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직업은 일제 조선 총독부의 건축과 기수였다. 폐결핵으로 좋은 직장을 사임하고 요양중 만난 금홍이란 기생과 서울에서 제비라는 다방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를 천재작가 이상이 되게한 시 '오감도(烏瞰圖)'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자 난해시라는 비평이 들끓어 중간에 게재가 중단되었다. 그는 언어 유희의 귀재로 해학을 발휘하여 일본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는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희구한다.

그러나 그의 꿈과 현실의 괴리의 폭이 너무 커서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않고 광폭해져 폐병으로 요절한 것이다. 불과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려 '이상문학상'이 제정된 것만 보아도 그가 한국 문단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인간 고통의 근원을 끊임없이 발견하려 했고, 27년의 길지 않은 인생동안 오직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끝없이 탐구하였던 것이다. 그를 향해 흔히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이었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시대는 그의 꿈을 박제화 하였던 것이다.

화가 이중섭(李仲燮) 은 이상과 동시대를 살았던 한국화단의 피카소라고 할 수 있다. 검색 포털 구글이 올해 그의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이중섭의 작품 '흰소'를 구글 로고로 변형해 선보인 적이 있다. 뿐아니라, 한국인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뮤지엄에 소장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창의롭고 인상적인 그림을 창조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세기가 지난후 세계는 드디어 그의 천재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일본인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간 후 부두 노동을 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창작활동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평양 오산학교에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자주정신과 창의를 중요시하는 가르침을 받아 그의 화풍은 매우 민족주의 색채가 뚜렸한 것이었다. 그가 한 민족의 끈기와 인내와 충실함으로 대표되는 한국소를 주로 그렸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소를 통해 민족과 개인 감정을, 또 싸우거나 만나려고 애쓰는 닭이나 까마귀를 통해서는 분단과 동족상잔을 치른 민족의 통합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또한 그는 죽을때까지 어린이같은 천진성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속에서 천진무구한 그의 성품을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아내와 두아이와 함께 살았던 서귀포였다. 그곳에는 그가 살았던 집을 개조하여 이중섭 미술관을 만들었다 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귀포의 환상'도 바로 이 언덕에서 상상한 '꿈의 세계'이다. 새를 타고 나는 아이, 주렁주렁 열린 과일을 따는 사람들. 그 건너편에 서귀포 앞바다가 정말 꿈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꿈이 캔버스에 유화로 담겨지지 못한다해서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다. 그릴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모두 훌륭한 캔버스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이상이나 이중섭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들과 같은 천재의 꿈이 어디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또다시 그들의 꿈을 이상이나 이중섭처럼 박제화(剝製化)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