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성 역사 신학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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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성 역사 신학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신태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여의도순복음총회(총회장 이영훈 목사)가 교단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15일 오전 9시 '기하성 역사 신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총재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 원로목사)는 "지난 60년 동안 우리 교단은 강력한 성령운동과 기도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해왔다. 또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를 위해 힘써왔다"며 "앞으로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적인 교단으로 우뚝 서야 한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총회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는 개회예배 설교에서 "우리 교단은 수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창립 60주년을 맞는 오늘날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단으로 우뚝 섰다"며 오순절성령운동은 ▲십자가신앙운동 ▲성령침례와 방언운동 ▲신유운동 ▲성령운동 ▲기도운동 ▲말씀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첫 강사로 나선 류동희 박사(한세대 역사신학)는 "교단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숱한 굴곡과 명암이 있었는데, 그 우여곡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보다 건강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하성 60년사를 소개했다.

1928년 럼시 선교사(Mary C. Rumesey)에 의해 한국에 오순절 신앙이 첫 소개됐고, 5년 뒤인 1932년 4월 럼시, 허홍, 박성선에 의해 최초의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가 시작됐다. 1933년 5월에는 수창동교회가 세워졌으며, 1938년 10월 5일 조선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열려 허홍, 박성산, 배부근이 안수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기독교 탄압 정책으로 1939년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 당했고, 교회는 점차 쇠퇴해갔다.

8.15 해방이 되자, 박성산 목사는 배부근, 허홍 목사와 결합하여 오순절교회 재건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한국 오순절교회의 발전을 위해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조직했으며, 1952년 12월 15일 체스넛 선교사(A. B. Chesnut)를 한국에 파송했다. 체스넛 선교사는 박성산, 배부근, 허홍 목사 등과 더불어 1953년 4월 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소재 남부교회에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창립했다. 초대 총리와 순복음신학교 교장에는 체스넛 선교사가 선출됐다.

1957년 11월 하나님의성회는 세 파로 분열되는 뼈아픈 일을 겪게 됐다. 허홍 목사는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로 환원했으며, 곽봉조, 윤성덕 목사는 구도선교회와 손잡고 극동사도선교회의 주역이 됐다. 이후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교세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1961년 순복음부흥회관(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을 개척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1964년 순복음중앙교회 담임목사 직분을 맡았고, 1966년 정식으로 목사 위임식을 가졌으며, 5월 19일 기하성 제15대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리고 계속해서 17대까지 10여년 동안 총회장을 역임했다.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는 기하성 역사에서도 부흥기였다. 기하성(당시 총회장 조용기 목사)은 1972년 10월 24일 대조동순복음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기독교대한오순절 총회와의 전격통합을 선언했다. 1979년 제28차 정기총회에서 헌법이 개정되어, 교단 최초의 여목사로 김유정, 최자실 목사가 인준받았다. 기하성은 1984년 여목제도를 정식 채택했다.

1981년에는 700여명의 교역자와 30만여명의 성도가 참석한 가운데,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회'를 서대문총회회관에서 개최했다.1981년 12월 7일 기하성은 2차 분열을 겪게 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대교구장을 하던 박용래 목사가 새롭게 개척한 신반포순복음교회가 지방회 심의를 받지 않고 총회에 바로 가입하자, 감정이 상한 조용기 목사가 1981년 10월 31일 교단 탈퇴를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조 목사는 10년 후인 1991년 12월 12일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등단해, 헤어졌던 동료 목사들과 함께 교단통합선언대회를 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0년대 들어, 미국이나 유럽 중심으로 진행되던 세계선교의 방향을 복음에 소외된 제3세계로 전환함과 동시에 영역을 확장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제20회 세계선교대회를 기점으로 해외이민목회 중심에서 제3세계 원주민 중심 선교로 방향을 전환했다. 제3세계 원주민선교라는 도전에 적극적으로 응전하기 위해 선교신학과 정책의 수립, 선교의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 선교의 정보화 및 문서작업 등이 추진됐다.

2008년 5월 14일 조용기 목사는 50년 동안 부흥시킨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영훈 목사에게 위임하고 원로목사에 추대됐다. 이후 '사랑행복나눔재단(현 조용기 자선재단)'을 설립해 사회봉사와 섬김의 사역에 여력을 다하고 있다. 올해 3월 25일 임시총회에서 대의원들은 총재 조용기 목사를 기하성 60주년 행사와 교단통합을 위한 임시 총회장에 추대했다. 이영훈 목사(여의도측 총회장)와 박성배 목사(서대문측 총회장)는 함께 강단에 서서 조용기 목사의 추대를 선포했다.

류 박사는 "기하성 교단의 부흥은 성령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교단이 성장해 온 것을 다시금 인식하고, 새롭게 교단에게 맡겨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호성 박사(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장)는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사역'을 소개했다. 영산의 대표적인 신학사상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6.25 전쟁 직후 폐허 더미에서 삶을 지탱하며 새로운 삶을 재건해야 했던 당시는, 가난과 절망과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팽배한 시기였다. 영산은 절대빈곤의 절망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서 목회하던 중 내세지향적 또는 탈세상적 복음이 아닌,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전인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오중복음의 신학적 구조는 ▲중생(거듭남)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이며, 삼중축복은 ▲영적 축복 ▲환경적 축복 ▲육체적 축복이다. '4차원의 영성'은 오중복음으로 표현되는 전인적 구원이 삼중축복이라는 실제적 적용으로 삶 속에서 실현되게 만드는 영적 원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4차원의 세계는 영적 세계로서, 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생각, 믿음, 꿈, 말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산의 '4차원의 영성'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모든 축복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십자가 은혜 없이는 구원의 축복도 없다고 설명한다.

김 박사는 "영산의 목회와 신학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생 이후 성령 충만을 통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강조하고, 성령 침례의 외적 표징으로서의 표적 방언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순절 성령운동 위에 굳게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며 "영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예루살렘 다락방의 오순절 성령 강림의 기반 위에서 목회와 신학을 전개해나간 결과 교단의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이어 "형이상학적인 신학 이론이 아니라 체험적 목회 철학이요 신학으로서의 그의 사상은 고달픈 삶의 투쟁 속에서 영적 갈증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왔다"며 "영산의 목회 사역을 통해 이를 체득해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원조 격으로 급성장하게 됐고, 영산으로부터 이를 배워서 자신의 목회현장에서 적용한 국내외의 제자들 역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됐다"고 했다.박문옥 박사(오순절교육목회연구원 원장)는 '순복음 선교사들의 발자취'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럼시 선교사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했다.한국에 온 럼시는 허홍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오순절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쳤고, 허홍은 그녀의 가르침을 통해 오순절신앙에 대해 배우게 된다. 허홍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며 기도로서 병을 고친다는 것을 배웠고 성령세례도 받게 됐다. 럼시는 허홍과 함께 시병원에 선교본부를 두고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기로 결정하지만, 당시는 한국교회에서 방언집회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았던 때였고, 럼시는 5년이 지난 1933년에 비로소 오순절교회를 세우게 된다.

박 박사는 "럼시 선교사의 선교 방법은 오순절 신앙의 적용과 감리교 선교정책의 원용으로 축약할 수 있다"며 "럼시는 정규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도 아니고, 교단으로부터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도 아니었지만, 그의 선교사역에는 일관된 선교방법이 보이고 성령과 함께한다는 확신과 단호함도 엿보인다. 오순절 신앙은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는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 모여서 팀을 이루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생생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동적인 성향의 신앙"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