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오두막>의 작가 윌리엄 폴 영(William Paul Young)이 5년 만에 신작 <갈림길(Cross Roads)>을 펴내고 한국을 찾았다. <갈림길>은 전편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큰 고난을 당한 주인공이 특별한 ‘계기’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면서, 상처와 오해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스스로 쌓아놓은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갈림길>에서 주인공 앤서니 스펜서는 고독하지만 부유하고 편안한 ‘자기만의 삶’을 영위하던 중, 갑자기 길에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 그의 ‘영혼’은 수많은 갈림길들을 만나게 되고, 아무런 지도이나 안내판도 없이 선택을 거듭하던 끝에 아일랜드인 남성 잭과 허름한 농장에 살고 있는 남성 ‘예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 할머니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이 황폐한 곳이 자신의 내면세계라는 사실과 함께, ‘예수’가 기거하는 곳이 작고 누추한 이유도 결국 자신 때문임을 깨닫는다. ‘토니’라 불리는 스펜서는 이들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마지막 순간 2천년 전 예수님처럼 한 아이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게 된다. 이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의 기적이다.
이같은 구조는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전편 <오두막>의 구조와 다른 듯 흡사하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겪은 고난과 이로 인한 상처들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복시킨다는 점,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 ‘아버지’가 주인공이라는 점, 소설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판타지적 요소들을 가미해 주인공들의 깨어진 관계 회복에 나서고 있다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음에도, 종교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이다.
저자인 윌리엄 폴 영은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큰 시련을 겪은 후, 모든 비밀과 아픔, 치욕적인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 깊은 곳의 공간인 ‘오두막’을 소재로 쓴 작품 <오두막>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 지난 2009년 한 차례 방한했다. 저자는 ‘교차로’를 뜻하는 단어 ‘crossroad’ 대신 중의적 표현 ‘Cross Roads’를 제목으로 삼은 이번 작품 <갈림길> 초고 3만 5천 단어를 단 11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12일 두 번째로 방한한 영을 서울 여의도동 세계사에서 만났다.
-두 작품을 다 읽었는데, 이번 작품은 주인공이 길을 떠난다는 점에서 <천로역정>과 다소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의 모티브를 어디에서 얻었나.
“주제를 미리 정해 놓고 글을 쓰지는 않는 타입이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유자재로 이동하게 하고 싶다(웃음). 저는 질문을 하나 던져놓고, 끊임없이 이를 탐구한다. 이번 작품의 주제는 ‘은혜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은혜를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사람의 인생 속에, 어떻게 은혜가 들어가고 그를 바꾸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정돼 있으면, 끔찍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보호망을 쳐 놓고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한다.
작품의 모티브는 여러 곳에서 얻는다.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divorce of heaven and hell·홍성사)>이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도 비슷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썼던 <오두막>과 달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 쓴 <오두막>은 동기나 마음가짐, 신앙적 자세에 있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난 4년간 전세계를 다니면서 주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가장 큰 변화는 <오두막>을 쓸 당시에는 직업을 3개나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웃음).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저는 <오두막> 이전에도 글을 쓰고 싶은 작가였고, 지금도 그렇다. 물론 <오두막> 이후, 많이 변했다. 좋은 변화가 많았지만, 인생에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곁에 친구들이 있고, 아내와 자녀, 손주까지…. 여전히 사랑스럽다. 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느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물론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느꼈던 점은,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늘 묻는 건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게 중요한 건 뭐지? 하는 세 가지…, 이런 질문들을 다뤄본 것이 제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큰 고난에 닥치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비신자나 신앙이 식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신앙이 회복하려면, 꼭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의 마음이 좀더 가난해져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늘어나는 것인가.
“그런 고통과 고난이 필연적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요한1서에 나와 있듯,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저는 사람들이 눈앞에 죄나 악, 피해나 고통 등을 하나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를 겪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과 죄악 위에 올라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을 행하기 위해 악을 만드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인간을 존중하신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힘든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그와 동행하시는 분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이다. 악이 생겨난 이유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방금 말씀드린 요한1서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 같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첫 마디가 비난이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악의 섞인 말을 저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선이신지 악이신지 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아마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없을 것이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기적들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적적인 장치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우리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지 않나.
“그게 바로 소설, 이야기의 힘이다. 예수님께서도 신약을 보면 진리를 가르치시려 끊임없이 비유나 이야기들을 활용하시지 않나? C. S. 루이스는 이를 ‘Watchful Dragon’이라 표현했다. 서구 패러다임에서는 서스펜스가 진실에 기반을 둔 과학적인 원리를 통해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수많은 영상이나 개념 등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동전을 줍는 여성이나 커다란 바위, 높은 탑처럼 비현실적인 내용이나 창의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모두 좀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픽션(fiction·소설, 허구)’은 이 모든 내용을 포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모두 사로잡을 수 있다. 픽션에서는 우리가 등장인물을 정의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탐구해야 한다. 제가 시도했던 탐구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믿을 만한 분이신지 등이다. 한국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웃음).”
-그러한 특성들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당신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보면 되겠나.
“물론이다. 픽션의 힘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루이스도, <반지의 제왕>의 톨킨도 그랬듯 저도 소설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우리는 이러한 창의적인 단어들이라는 ‘가교’를 통해 사람들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 마음 속에 다가가시기 위해 무지개나 바다, 산 등 무엇이건 창의적으로 활용하신다.”
-<갈림길>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생과 사를 오가는 주인공이 ‘중간 지대’라는 곳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을 ‘연옥’이라 오해할 수도 있을텐데.
“그 중간지대가 연옥을 의미하진 않는다.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과 신체적이고 물리적으로 다른 세상이라 표현하고 싶다. 주인공은 의학적으로 깊은 의식불명 상태를 말하는 코마(Coma) 단계에 있었다. 저는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루이스는 이에 대해 ‘우리 모두 이 중간지점에 대해 알고 있지만, 어떻게 이곳이 만들어졌는지는 추측해야 할 뿐’이라고 말했다. 저나 우리도 마찬가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추측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오두막>에서도 흑인 아주머니 차림의 하나님이 등장했고, 이번 작품에서도 ‘성령’이 아메리칸 인디언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왔다. 두 작품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해 주인공과 관계를 갖는 장면을 보면 삼위일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의 삼위일체관은 무엇인가.
“제 삼위일체관은 초대교회 때 아타나시우스가 확립했던, 정통 기독교회의 그것과 일치한다. 세 위격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제 작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며,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개념을 완벽히 받아들인다. 단, 작품에서 나오듯 이들이 어우러져 함께 춤을 추는 듯한 ‘perichoresis(상호 내주)’가 강조될 뿐이다. 모든 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 완성된다. 이런 개념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모든 것이 관계에서,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다. 저는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재정의하려는 게 아니라, 좀더 쉽게 이야기해 주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자가 많이 늘어났지만, 당신이 쓴 <오두막>이나 <갈림길>처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기독교 소설’이 활성화돼 있지 못한데 조언을 해줄 수 있나.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에 대해 귀띔해 달라.
“저는 항상 작가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작가이다. 한때는 제 작품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작가 여러분들을 격려하고 싶다. 그리고 차기작은 10가지 정도를 구상 중인데, 주제는 늘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제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는 역사나 과학 소설, 또는 일반적인 스토리도 생각 중이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하다.”
<갈림길>에서 주인공 앤서니 스펜서는 고독하지만 부유하고 편안한 ‘자기만의 삶’을 영위하던 중, 갑자기 길에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 그의 ‘영혼’은 수많은 갈림길들을 만나게 되고, 아무런 지도이나 안내판도 없이 선택을 거듭하던 끝에 아일랜드인 남성 잭과 허름한 농장에 살고 있는 남성 ‘예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 할머니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이 황폐한 곳이 자신의 내면세계라는 사실과 함께, ‘예수’가 기거하는 곳이 작고 누추한 이유도 결국 자신 때문임을 깨닫는다. ‘토니’라 불리는 스펜서는 이들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마지막 순간 2천년 전 예수님처럼 한 아이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게 된다. 이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의 기적이다.
이같은 구조는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전편 <오두막>의 구조와 다른 듯 흡사하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겪은 고난과 이로 인한 상처들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복시킨다는 점,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 ‘아버지’가 주인공이라는 점, 소설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판타지적 요소들을 가미해 주인공들의 깨어진 관계 회복에 나서고 있다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음에도, 종교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이다.
저자인 윌리엄 폴 영은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큰 시련을 겪은 후, 모든 비밀과 아픔, 치욕적인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 깊은 곳의 공간인 ‘오두막’을 소재로 쓴 작품 <오두막>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 지난 2009년 한 차례 방한했다. 저자는 ‘교차로’를 뜻하는 단어 ‘crossroad’ 대신 중의적 표현 ‘Cross Roads’를 제목으로 삼은 이번 작품 <갈림길> 초고 3만 5천 단어를 단 11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12일 두 번째로 방한한 영을 서울 여의도동 세계사에서 만났다.
-두 작품을 다 읽었는데, 이번 작품은 주인공이 길을 떠난다는 점에서 <천로역정>과 다소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의 모티브를 어디에서 얻었나.
“주제를 미리 정해 놓고 글을 쓰지는 않는 타입이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유자재로 이동하게 하고 싶다(웃음). 저는 질문을 하나 던져놓고, 끊임없이 이를 탐구한다. 이번 작품의 주제는 ‘은혜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은혜를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사람의 인생 속에, 어떻게 은혜가 들어가고 그를 바꾸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정돼 있으면, 끔찍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보호망을 쳐 놓고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한다.
작품의 모티브는 여러 곳에서 얻는다.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divorce of heaven and hell·홍성사)>이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도 비슷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갈림길>의 윌리엄 폴 영은 현재 퍼시픽 노스웨스트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글을 쓰며, 가족과 함께 축복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한다. ⓒ신태진 기자 |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썼던 <오두막>과 달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 쓴 <오두막>은 동기나 마음가짐, 신앙적 자세에 있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난 4년간 전세계를 다니면서 주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가장 큰 변화는 <오두막>을 쓸 당시에는 직업을 3개나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웃음).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저는 <오두막> 이전에도 글을 쓰고 싶은 작가였고, 지금도 그렇다. 물론 <오두막> 이후, 많이 변했다. 좋은 변화가 많았지만, 인생에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곁에 친구들이 있고, 아내와 자녀, 손주까지…. 여전히 사랑스럽다. 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느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물론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느꼈던 점은,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늘 묻는 건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게 중요한 건 뭐지? 하는 세 가지…, 이런 질문들을 다뤄본 것이 제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큰 고난에 닥치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비신자나 신앙이 식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신앙이 회복하려면, 꼭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의 마음이 좀더 가난해져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늘어나는 것인가.
“그런 고통과 고난이 필연적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요한1서에 나와 있듯,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저는 사람들이 눈앞에 죄나 악, 피해나 고통 등을 하나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를 겪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과 죄악 위에 올라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을 행하기 위해 악을 만드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인간을 존중하신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힘든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그와 동행하시는 분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이다. 악이 생겨난 이유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방금 말씀드린 요한1서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 같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첫 마디가 비난이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악의 섞인 말을 저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선이신지 악이신지 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아마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없을 것이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기적들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적적인 장치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우리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지 않나.
“그게 바로 소설, 이야기의 힘이다. 예수님께서도 신약을 보면 진리를 가르치시려 끊임없이 비유나 이야기들을 활용하시지 않나? C. S. 루이스는 이를 ‘Watchful Dragon’이라 표현했다. 서구 패러다임에서는 서스펜스가 진실에 기반을 둔 과학적인 원리를 통해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수많은 영상이나 개념 등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동전을 줍는 여성이나 커다란 바위, 높은 탑처럼 비현실적인 내용이나 창의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모두 좀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픽션(fiction·소설, 허구)’은 이 모든 내용을 포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모두 사로잡을 수 있다. 픽션에서는 우리가 등장인물을 정의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탐구해야 한다. 제가 시도했던 탐구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믿을 만한 분이신지 등이다. 한국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웃음).”
-그러한 특성들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당신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보면 되겠나.
“물론이다. 픽션의 힘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루이스도, <반지의 제왕>의 톨킨도 그랬듯 저도 소설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우리는 이러한 창의적인 단어들이라는 ‘가교’를 통해 사람들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 마음 속에 다가가시기 위해 무지개나 바다, 산 등 무엇이건 창의적으로 활용하신다.”
-<갈림길>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생과 사를 오가는 주인공이 ‘중간 지대’라는 곳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을 ‘연옥’이라 오해할 수도 있을텐데.
“그 중간지대가 연옥을 의미하진 않는다.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과 신체적이고 물리적으로 다른 세상이라 표현하고 싶다. 주인공은 의학적으로 깊은 의식불명 상태를 말하는 코마(Coma) 단계에 있었다. 저는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루이스는 이에 대해 ‘우리 모두 이 중간지점에 대해 알고 있지만, 어떻게 이곳이 만들어졌는지는 추측해야 할 뿐’이라고 말했다. 저나 우리도 마찬가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추측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오두막>에서도 흑인 아주머니 차림의 하나님이 등장했고, 이번 작품에서도 ‘성령’이 아메리칸 인디언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왔다. 두 작품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해 주인공과 관계를 갖는 장면을 보면 삼위일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의 삼위일체관은 무엇인가.
“제 삼위일체관은 초대교회 때 아타나시우스가 확립했던, 정통 기독교회의 그것과 일치한다. 세 위격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제 작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며,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개념을 완벽히 받아들인다. 단, 작품에서 나오듯 이들이 어우러져 함께 춤을 추는 듯한 ‘perichoresis(상호 내주)’가 강조될 뿐이다. 모든 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 완성된다. 이런 개념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모든 것이 관계에서,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다. 저는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재정의하려는 게 아니라, 좀더 쉽게 이야기해 주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자가 많이 늘어났지만, 당신이 쓴 <오두막>이나 <갈림길>처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기독교 소설’이 활성화돼 있지 못한데 조언을 해줄 수 있나.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에 대해 귀띔해 달라.
“저는 항상 작가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작가이다. 한때는 제 작품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작가 여러분들을 격려하고 싶다. 그리고 차기작은 10가지 정도를 구상 중인데, 주제는 늘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제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는 역사나 과학 소설, 또는 일반적인 스토리도 생각 중이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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