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설교의 흐름이 선포에서 설득으로 진행된 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신앙인들은 현대인들과 별반다르지 않은 사고의 틀 속에 있다는 상황에서 현대의 설교학계와 설교자들이 그 탈출구를 선포에서 설득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닌것이다. 저들은 로고스 중심주의를 배척하고 얼마간의 종교다원주의로 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와 추구보다는 세상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해에 편중하며,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현대인들에게 객관적이며 유일성을 가진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며 구원의 유일성에 대한 강조를 유보하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은 설득이 가진 한계성 때문이다.
한편, 선포 설교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현대적 상황에서 찾는 것 보다는 설교자들에게서 찾아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대다수의 현대 설교자들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의 틀에서 설교를 개진하고 있기때문이다. 말하자면 설교가 하나님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편에서 시작되기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은 성경에 이르기를 하며 서두를 떼는 것은 금물이되고, 현대인의 삶과 문화속에 융합되어 있는 공통의 관심을 추출하여 화두로 삼는 것이 대 유행인 점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또한, 현대 설교자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권위를 스스로 실추하였기 때문에 선포보다는 설득을 선호하게 되었다. 설교자가 말씀을 삼가 들어야 할 회중과 별다르지 않는 위인임을 간파한 악한 마귀 사단의 정죄가 그의 선포사역을 훼방하며 정죄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미국 어느 시골 한인교회에 부임한 목사가 평신도들과 맥주파티를 함께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함께하여 최초에는 인기가 있었는데 차츰 그 파티의 주동 인물들이 하나 둘씩 교회에서 사라졌다. 그 이유는 목사가 자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뿐아니라 설교의 선포에서 나타나야할 성령의 역사가 희귀해졌다는 것이다. 말씀선포에 따라 그 말씀이 회중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 어떤자에게는 징계와 심판으로, 또 어떤자에게는 위로와 감짝 놀랄만한 응답으로 나타나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없었던 전 시대의 설교자들의 능력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한편의 설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전 시대의 말씀의 사자들이 보여 주었던 그 열정과 다함이 없는 노력과 정성이 사라지고 설교외적 목회사역에 우선순위를 두고 동분서주하니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이 복음은! 이 아들로 말하면! 하고 선포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설득 설교인들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의 설교를 잉태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자만이 말씀 선포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한편의 설교가 회중의 심령을 통타하기 위하여 기도로 뜨겁게 달구지 않고서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에서 살고있는 현대 회중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할수 없을 것이다.
[정인량 칼럼] 선포 설교의 취약성
워싱턴영광장로교회 정인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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