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
2개월간 준비 끝에 수준 높은 공연
익명의 크리스천에서
예수의 삶 사는 제자로
우리 잘못으로 인해 떨어진 교회 권위
예수의 사랑과 부활 붙잡을 때
비로소 회복과 변화 가능
“어둠 가운데서 만나던 주님을 빛 가운데서 만났다”는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이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며 동시에 고백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성순복음교회를 섬기는 모든 교역자들이 2개월 간 각고의 노력 끝에 무대에 올린 뮤지컬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이 전하는 메시지였다. 나성순복음교회는 1년을 주기로 교회 내 모든 부서와 기관이 돌아가며 금요일마다 헌신예배를 드린다. 지난 2월 1일에는 이 교회 교역자들이 헌신예배에서 뮤지컬을 공연했다.
이 뮤지컬의 배경은 이미 성경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으며 자신의 묘실을 갖고 있을만큼 상당한 부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침내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만장일치로 십자가형을 언도했다는 점에서 요셉 역시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진 않다. 그런데 그는 예수가 죽은 후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장사 지낸다.
뮤지컬에서 요셉은 노래한다. “예수님은 날 위해 어둠 속에서 만나주셨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신의 삶에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그런 멋진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부와 명예,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밤에만 몰래 찾아가서 예수를 만난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비겁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까지도 용납해 주셨다.
그러나 그저 비겁하다고 말하기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떳떳하진 않다. 교회 밖에서 식사 기도를 한번 하려고 해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어느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다더라, 어느 교회가 분열했다더라, 어느 목사, 장로가 이러고 있다더라는 소문에 한없이 위축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동성애 논쟁에 입을 다물고, 반기독교 정책에 두 손을 들고, 사회를 향해 “나는 그리스도인이요”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진 않던가? 예수보다 산헤드린 뒤에 애써 숨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아니던가?
이 뮤지컬 초반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만난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는 장면은 다소 역겹기까지 하다. 예수를 믿고 “난 구원 받았다”, “난 진리를 깨달았다”고 외치고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정작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고 싶은 오늘날 우리의 이중성, 아니, 나의 이중성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예수의 사후에 그는 용기를 낸다. 결단을 한다. 예수의 사후였으니 분위기는 한층 더 흉흉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자신의 부, 명예, 모든 것이 다 거기 함께 달려 날아갈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그가 붙잡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메시아를 장사하겠다는 거창한 말도,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아닌,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 주던 예수의 사랑, 그 진리가 그로 하여금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물론 이 용기의 대가는 동료들의 외면과 박해, 공격이다.
이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눈물로 닦는 장면이다. 요셉의 흐느낌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저 울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력감과 패배감, 죄책감과 두려움… 오늘날 거대한 세상의 파도 속에 잠겨버린 그리스도인의 두려움,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예수가 죽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의 비겁함으로 인해 예수가 대신 수치를 당하고 교회가 대신 욕을 먹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믿었는데 우리가 예수와 그의 몸된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려 버렸다. 요셉이 묻는 것 같다. “당신도 나처럼 예수님의 수치당함을 그냥 보고 있었나요? 아니 그 수치당함에 동조했나요?”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묘사하는 바는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닦는다”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보혈이 요셉을 적신다”에 가깝다. 비겁한 요셉이 예수의 사랑을 깨달은 후, 그는 역사상 처음 예수의 보혈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제자가 된다.
무대는 여전히 어둠에 잠식돼 있다. 정적만 흐른다. 울어도 소용없고 이젠 너무 늦었을까? 그러나 잠시 뒤, 등장한 요셉의 하인이 외친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예수는 죽었다고 절망해 있던 그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했다고, 우리가 사실 그분의 제자였다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어져 버린 그 자리에서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
요셉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를 붙잡고 노래한다. “어둠 속에서만 만나던 예수를 이제 빛 가운데 만났노라”고. 자신의 비겁함과 용기 없음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만 만나던 예수였는데 보혈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 그 보혈에 자신을 씻고 보니 이제 예수 부활의 영광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고백적 노래다.
이 뮤지컬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뮤지컬이자 브로드웨이 진출작<마리아 마리아>를 제작한 기독교문화사역 전문인들이 2006년 창작한 작품이다. 나성순복음교회 교역자들은 1세 교역자는 물론 2세 교역자들까지 모두 연합한 가운데, 단순한 교회 성극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 높은 연기와 노래를 펼쳐 큰 감동을 선사했다.
한편, 담임인 진유철 목사가 올 회기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섬기며 이 교회는 매 예배 때마다 남가주 교계의 연합과 권위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뮤지컬은 이런 때에 발 맞추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어떤 용기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개월간 준비 끝에 수준 높은 공연
익명의 크리스천에서
예수의 삶 사는 제자로
우리 잘못으로 인해 떨어진 교회 권위
예수의 사랑과 부활 붙잡을 때
비로소 회복과 변화 가능
“어둠 가운데서 만나던 주님을 빛 가운데서 만났다”는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이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며 동시에 고백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성순복음교회를 섬기는 모든 교역자들이 2개월 간 각고의 노력 끝에 무대에 올린 뮤지컬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이 전하는 메시지였다. 나성순복음교회는 1년을 주기로 교회 내 모든 부서와 기관이 돌아가며 금요일마다 헌신예배를 드린다. 지난 2월 1일에는 이 교회 교역자들이 헌신예배에서 뮤지컬을 공연했다.
이 뮤지컬의 배경은 이미 성경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으며 자신의 묘실을 갖고 있을만큼 상당한 부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침내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만장일치로 십자가형을 언도했다는 점에서 요셉 역시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진 않다. 그런데 그는 예수가 죽은 후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장사 지낸다.
뮤지컬에서 요셉은 노래한다. “예수님은 날 위해 어둠 속에서 만나주셨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신의 삶에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그런 멋진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부와 명예,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밤에만 몰래 찾아가서 예수를 만난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비겁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까지도 용납해 주셨다.
그러나 그저 비겁하다고 말하기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떳떳하진 않다. 교회 밖에서 식사 기도를 한번 하려고 해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어느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다더라, 어느 교회가 분열했다더라, 어느 목사, 장로가 이러고 있다더라는 소문에 한없이 위축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동성애 논쟁에 입을 다물고, 반기독교 정책에 두 손을 들고, 사회를 향해 “나는 그리스도인이요”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진 않던가? 예수보다 산헤드린 뒤에 애써 숨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아니던가?
이 뮤지컬 초반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만난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는 장면은 다소 역겹기까지 하다. 예수를 믿고 “난 구원 받았다”, “난 진리를 깨달았다”고 외치고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정작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고 싶은 오늘날 우리의 이중성, 아니, 나의 이중성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예수의 사후에 그는 용기를 낸다. 결단을 한다. 예수의 사후였으니 분위기는 한층 더 흉흉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자신의 부, 명예, 모든 것이 다 거기 함께 달려 날아갈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그가 붙잡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메시아를 장사하겠다는 거창한 말도,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아닌,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 주던 예수의 사랑, 그 진리가 그로 하여금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물론 이 용기의 대가는 동료들의 외면과 박해, 공격이다.
이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눈물로 닦는 장면이다. 요셉의 흐느낌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저 울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력감과 패배감, 죄책감과 두려움… 오늘날 거대한 세상의 파도 속에 잠겨버린 그리스도인의 두려움,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예수가 죽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의 비겁함으로 인해 예수가 대신 수치를 당하고 교회가 대신 욕을 먹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믿었는데 우리가 예수와 그의 몸된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려 버렸다. 요셉이 묻는 것 같다. “당신도 나처럼 예수님의 수치당함을 그냥 보고 있었나요? 아니 그 수치당함에 동조했나요?”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묘사하는 바는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닦는다”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보혈이 요셉을 적신다”에 가깝다. 비겁한 요셉이 예수의 사랑을 깨달은 후, 그는 역사상 처음 예수의 보혈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제자가 된다.
무대는 여전히 어둠에 잠식돼 있다. 정적만 흐른다. 울어도 소용없고 이젠 너무 늦었을까? 그러나 잠시 뒤, 등장한 요셉의 하인이 외친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예수는 죽었다고 절망해 있던 그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했다고, 우리가 사실 그분의 제자였다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어져 버린 그 자리에서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
요셉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를 붙잡고 노래한다. “어둠 속에서만 만나던 예수를 이제 빛 가운데 만났노라”고. 자신의 비겁함과 용기 없음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만 만나던 예수였는데 보혈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 그 보혈에 자신을 씻고 보니 이제 예수 부활의 영광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고백적 노래다.
이 뮤지컬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뮤지컬이자 브로드웨이 진출작<마리아 마리아>를 제작한 기독교문화사역 전문인들이 2006년 창작한 작품이다. 나성순복음교회 교역자들은 1세 교역자는 물론 2세 교역자들까지 모두 연합한 가운데, 단순한 교회 성극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 높은 연기와 노래를 펼쳐 큰 감동을 선사했다.
한편, 담임인 진유철 목사가 올 회기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섬기며 이 교회는 매 예배 때마다 남가주 교계의 연합과 권위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뮤지컬은 이런 때에 발 맞추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어떤 용기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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