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설교가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와 에토스의 관계이다. 필립스 부룩스가 산책하는 보스턴거리는 우중충한 날씨도 명랑케 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만큼 그의 인격은 바른 에토스를 구사케 하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효과적인 연설이 되기 위해서는 청중들이 말하는 사람의 인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일찍 지적한바 있다.
설교자가 로고스의 전문가 되어야 함을 살펴 보았거니와 다음으로는 그 로고스를 어떤 인격에 담아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똑같은 로고스를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이 받는 파토스가 천양지차가 되는 이유는 바로 전달하는자의 에토스가 관건인 까닭이다. 자신의 분노를 담아 로고스를 전달할때 그 로고스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에 의해 받아드려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설교자의 인격이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 사역에 있어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40년 넘게 설교하는 자로서, 또 수많은 선후배의 설교를 들었던 경험자로서 그의 로고스가 아주 잘 짜여지고 흠잡을데 없는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품, 그의 정서, 그의 반 도덕적인 행위가 그의 에토스에 풍겨나와 그의 설교를 실패케 하는 예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한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 설교는 아니지만 신학강의 하는 자가 청중의 곤란한 질문에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이 나와 강의해보라고 소리질러 그 세미나를 망쳐버린적이 있다. 설교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토로하는 변론장이거나 성토장이 아니며, 억지로 아멘을 이끌어 내는 경연장이 아니다. 설교는 말할나위없이 더욱 세심한 에토스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 고도의 영적 전쟁이다. 설교행위는 마치 총검술과 같아서 결코 단도만 가지고는 위력을 발휘할 수 없고 총자루에 그 검을 꽃아 찔러야 효력이 나타남과 같은 이치인 까닭이다. 그 총자루는 설교자의 평소 닦아온 인격인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삶속에서 절로 풍겨 나오는 진솔한 에토스가 로고스를 성공시킨다. 목회애환을 한 방울의 눈물로 대변한 어느 설교자의 로고스는 그 날 파토스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눈물이 결코 연기가 아니라 진실임이 청중에게 큰 공감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로고스를 에토스와 함께 준비하여야 한다.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때 그를 아는 청중이라면 그가 로고스를 전하기도 전에 먼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알지못하는 청중은 첫 인상을 눈여겨 보게 될것이다. 설교자는 이런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설교행위인 것이다.
신학자이며 설교가인 헬무트 틸리케는 교회가 위기에 놓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설교자들의 신뢰받지 못하는 인격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진실로 설교에서는 설교자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기술과 능력,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성품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3년의 신학교 수업에 있어서 설교학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로고스의 준비에만 급급하여 에토스의 중요성을 망각한 설교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이 씁쓸할 뿐이다.
[정인량 칼럼] 설교자와 에토스의 관계
워싱턴영광장로교회 정인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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