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유익성을 인정하는 ‘무신론 2.0’이 등장했다는 최근 보도가 관심을 끈 가운데, ‘무신론자의 실존적 종교 활용 매뉴얼의 명암’을 분석한 글이 발표됐다. 지난 8일부로 법인화가 완료된 사단법인 동서신학포럼 발간 ‘동서신학평론’ 2집에서 김학철 교수(연세대)는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들의 종교>를 비평했다.
김 교수는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주창한 ‘종교가 없는 시대와 사회의 도래’는 빗나갔다고 전제했다. 북미 기독교 인구는 줄었지만 예상보다 큰 폭이 아니었고, 대신 제3세계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특히 G2로 불리는 중국 기독교인 수는 공산당원 수를 추월했다. ‘교회나 수도원 소유의 땅이 평신도에게 팔려나감’이라는 애초 ‘세속화’ 단어의 유래를 제공한 유럽에서도 물론 기독교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다른 종교 즉 이슬람 인구가 급격히 상승했다. 결국 전세계에서는 ‘세속 사회’ 대신 ‘종교의 귀환’이 이뤄지고 있다. 개개인의 ‘영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거세지고, 종교 인구 역시 한쪽에서 줄지만 다른 쪽에서 늘고 있는 등 종교에 대한 양상은 현재 매우 복잡하다.
세속 지식사회는 이를 두고 두 가지 반응으로 양분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적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의 귀환 또는 부흥을 냉소 또는 조롱하고 ‘인류 삶에 끼치는 해악의 근원’이라며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또다른 쪽에서는 이를 적극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주 아감벤 등의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예수와 바울 서신을 연구하는 등 기독교와 성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도킨스를 믿어야 하나”면서 “어둠과 고통,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의 기독교”에 자신들의 정신적 자원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김 교수가 분석한 알랭 드 보통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큼은 일생 동안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이전의 무신론자들처럼 종교를 경멸 혹은 냉소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보다 종교를 통해 배워야 할 것, 보다 정확히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취사선택할 종교의 통찰과 유산을 점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이 깨달은,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종교의 필요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몸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직업상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에 보통은 <무신론자들의 종교>를 통해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태도와 실존주의적 논점들을 살피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신론 자연과학자들’과 다른 방법이다. 김 교수는 “종교에서 ‘영성’을 끄집어내려는 보통의 주 독자들은 현실 변혁에 나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종교를 혐오하는 자연과학자들 모두에게 동의할 수 없는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고 전했다.
보통은 교회 제의의 여러 요소들과 거기에 깃든 정신, 교회 건축물 등이 현대의 지리멸렬한 개인주의가 빚은 소외와 고독, 파편화를 넘어서는 데 훌륭한 통찰의 빛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죄)을 돌아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영웅과 달리 고난받는 사람(예수)을 명예롭게 하려 한다는 것. 여기서 나타나는 보통의 인간관은 인간이 충분히 주체적이고 성숙하여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으므로 어떤 간섭이나 도덕적 훈계 따위가 필요없다는 현대의 ‘낙관주의’에 반대한다. 사람들에게는 도덕과 악덕에 대한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들의 종교>.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비관주의적 인간관, 인간은 우주와 영원에서 볼 때 매우 작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은 삶을 위한 통찰의 최소 출발점”이라며 “미술과 건축, 여러 제도 등은 보통이 제안했던 종교의 유익을 강화하고 전달하는 핵심 매체였고, 그 매체들에 담긴 메시지가 전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가치들 역시 무신론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책에서 보통은 무신론자들이 종교에서 취할 수 있는 교훈들을 체계화하는 방법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속이 종교를 활용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얻어온 사례는 드물지 않았고, 종교를 전유(專有)하는 마키아벨리와 에드워드 기븐, 어거스트 콩트 등의 방식은 하나님이나 교리, 신앙 등 자신들이 껄끄러워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서 출발했다.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종교 전유 방식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종교에 대해 마치 새로운 연인에게 호의를 보이듯 다정하지만,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며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교리’가 없는 종교이지만,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학철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며 “종교에 접근하면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을 그저 우회하려는 방식은 철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고, 이러한 손쉬운 우회는 도킨스 같은 자연과학자들의 나태함보다 더 비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통이 교리 등의 수용을 꺼리거나 아무런 숙고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그의 통념적 이해에서 비롯됐고, 이 부분에서 그의 종교 이해는 자신이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도킨스 류의 종교 이해와 하등 다를 바 없다”며 “보통 같은 세속 지식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종교의 ‘꽃과 열매’는 결코 종교의 ‘나무와 그 뿌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기독교인들 편에서 보통의 책은 ‘주 요리가 나오기 전 전채 요리에서 식사를 그치기 원하는 사람’ 혹은 ‘찐빵의 단팥 없는 부분만을 베어 물은 사람’, ‘전체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 소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되풀이하는 사람’ 혹은 ‘아버지와 사는 것은 싫어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좋아해 그의 몫을 챙기고 멀리 떠난 둘째 아들’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무신론자들의 종교>의 공헌은 뚜렷하다”고 했다. 무신론자들 혹은 비종교인들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대하는 태도의 ‘선택지’를 늘려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도킨스의 과학주의에 경도되기도 싫고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도 탐탁지 않은 이들에게, 무신론적 신념 혹은 비종교인의 자세를 지키면서도 그들의 삶을 풍성히 해줄 자원이 종교에 있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줄 수 있다”며 “이는 종교를 혐오하거나 종교적 언어를 통해 해방운동에 참여하라는 독촉 모두에서 거리를 두려는 비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실존적 문제들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종교가 그들의 질문을 이미 오래 전에 했고 그에 대해 여러 대답들을 함께 고민해 왔음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들 중 일부가 기독교의 대답에 긍정한다면, 이것이 ‘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것.
김학철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 책은 무신론자나 비종교인 모두 종교를 침착하고 정성스레 관찰하고 다시 보게 하는 데 분명히 공헌할 것”이라며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종교의 단물만을 취하고 다른 부분은 거들떠보지 않는 비도덕적 책’이라 비판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보통의 종교 접근방법을 재치있게 역이용해 실용서적으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라고 제안했다.
이 책을 통해 현대인들의 구체적인 필요와 결핍, 갈증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느 선까지 복음의 내용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을지 등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집에 방문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빛나 보이지만 우리가 그간 소홀히 했던 항목들을 발견하고 그 위에 앉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유산에 기뻐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동서신학평론 2집에는 이외에도 김회권 교수(숭실대)가 ‘월터 브루그만의 구약신학 자세히 읽기’, ‘이규성 교수(서강대)가 도올의 책을 비평한 ‘사랑하지 말자?’,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가 김세윤 교수의 저작 <그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두란노)>을 분석한 ‘그 사람의 아들로 미로를 뚫다’를 각각 발표했다.
김 교수는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주창한 ‘종교가 없는 시대와 사회의 도래’는 빗나갔다고 전제했다. 북미 기독교 인구는 줄었지만 예상보다 큰 폭이 아니었고, 대신 제3세계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특히 G2로 불리는 중국 기독교인 수는 공산당원 수를 추월했다. ‘교회나 수도원 소유의 땅이 평신도에게 팔려나감’이라는 애초 ‘세속화’ 단어의 유래를 제공한 유럽에서도 물론 기독교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다른 종교 즉 이슬람 인구가 급격히 상승했다. 결국 전세계에서는 ‘세속 사회’ 대신 ‘종교의 귀환’이 이뤄지고 있다. 개개인의 ‘영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거세지고, 종교 인구 역시 한쪽에서 줄지만 다른 쪽에서 늘고 있는 등 종교에 대한 양상은 현재 매우 복잡하다.
세속 지식사회는 이를 두고 두 가지 반응으로 양분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적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의 귀환 또는 부흥을 냉소 또는 조롱하고 ‘인류 삶에 끼치는 해악의 근원’이라며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또다른 쪽에서는 이를 적극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주 아감벤 등의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예수와 바울 서신을 연구하는 등 기독교와 성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도킨스를 믿어야 하나”면서 “어둠과 고통,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의 기독교”에 자신들의 정신적 자원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김 교수가 분석한 알랭 드 보통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큼은 일생 동안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이전의 무신론자들처럼 종교를 경멸 혹은 냉소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보다 종교를 통해 배워야 할 것, 보다 정확히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취사선택할 종교의 통찰과 유산을 점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이 깨달은,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종교의 필요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몸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직업상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에 보통은 <무신론자들의 종교>를 통해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태도와 실존주의적 논점들을 살피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신론 자연과학자들’과 다른 방법이다. 김 교수는 “종교에서 ‘영성’을 끄집어내려는 보통의 주 독자들은 현실 변혁에 나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종교를 혐오하는 자연과학자들 모두에게 동의할 수 없는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고 전했다.
보통은 교회 제의의 여러 요소들과 거기에 깃든 정신, 교회 건축물 등이 현대의 지리멸렬한 개인주의가 빚은 소외와 고독, 파편화를 넘어서는 데 훌륭한 통찰의 빛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죄)을 돌아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영웅과 달리 고난받는 사람(예수)을 명예롭게 하려 한다는 것. 여기서 나타나는 보통의 인간관은 인간이 충분히 주체적이고 성숙하여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으므로 어떤 간섭이나 도덕적 훈계 따위가 필요없다는 현대의 ‘낙관주의’에 반대한다. 사람들에게는 도덕과 악덕에 대한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들의 종교>.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비관주의적 인간관, 인간은 우주와 영원에서 볼 때 매우 작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은 삶을 위한 통찰의 최소 출발점”이라며 “미술과 건축, 여러 제도 등은 보통이 제안했던 종교의 유익을 강화하고 전달하는 핵심 매체였고, 그 매체들에 담긴 메시지가 전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가치들 역시 무신론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책에서 보통은 무신론자들이 종교에서 취할 수 있는 교훈들을 체계화하는 방법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속이 종교를 활용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얻어온 사례는 드물지 않았고, 종교를 전유(專有)하는 마키아벨리와 에드워드 기븐, 어거스트 콩트 등의 방식은 하나님이나 교리, 신앙 등 자신들이 껄끄러워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서 출발했다.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종교 전유 방식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종교에 대해 마치 새로운 연인에게 호의를 보이듯 다정하지만,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며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교리’가 없는 종교이지만,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학철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며 “종교에 접근하면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을 그저 우회하려는 방식은 철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고, 이러한 손쉬운 우회는 도킨스 같은 자연과학자들의 나태함보다 더 비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통이 교리 등의 수용을 꺼리거나 아무런 숙고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그의 통념적 이해에서 비롯됐고, 이 부분에서 그의 종교 이해는 자신이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도킨스 류의 종교 이해와 하등 다를 바 없다”며 “보통 같은 세속 지식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종교의 ‘꽃과 열매’는 결코 종교의 ‘나무와 그 뿌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기독교인들 편에서 보통의 책은 ‘주 요리가 나오기 전 전채 요리에서 식사를 그치기 원하는 사람’ 혹은 ‘찐빵의 단팥 없는 부분만을 베어 물은 사람’, ‘전체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 소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되풀이하는 사람’ 혹은 ‘아버지와 사는 것은 싫어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좋아해 그의 몫을 챙기고 멀리 떠난 둘째 아들’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무신론자들의 종교>의 공헌은 뚜렷하다”고 했다. 무신론자들 혹은 비종교인들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대하는 태도의 ‘선택지’를 늘려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도킨스의 과학주의에 경도되기도 싫고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도 탐탁지 않은 이들에게, 무신론적 신념 혹은 비종교인의 자세를 지키면서도 그들의 삶을 풍성히 해줄 자원이 종교에 있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줄 수 있다”며 “이는 종교를 혐오하거나 종교적 언어를 통해 해방운동에 참여하라는 독촉 모두에서 거리를 두려는 비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실존적 문제들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종교가 그들의 질문을 이미 오래 전에 했고 그에 대해 여러 대답들을 함께 고민해 왔음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들 중 일부가 기독교의 대답에 긍정한다면, 이것이 ‘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것.
김학철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 책은 무신론자나 비종교인 모두 종교를 침착하고 정성스레 관찰하고 다시 보게 하는 데 분명히 공헌할 것”이라며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종교의 단물만을 취하고 다른 부분은 거들떠보지 않는 비도덕적 책’이라 비판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보통의 종교 접근방법을 재치있게 역이용해 실용서적으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라고 제안했다.
이 책을 통해 현대인들의 구체적인 필요와 결핍, 갈증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느 선까지 복음의 내용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을지 등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집에 방문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빛나 보이지만 우리가 그간 소홀히 했던 항목들을 발견하고 그 위에 앉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유산에 기뻐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동서신학평론 2집에는 이외에도 김회권 교수(숭실대)가 ‘월터 브루그만의 구약신학 자세히 읽기’, ‘이규성 교수(서강대)가 도올의 책을 비평한 ‘사랑하지 말자?’,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가 김세윤 교수의 저작 <그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두란노)>을 분석한 ‘그 사람의 아들로 미로를 뚫다’를 각각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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