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감사절을 맞으며 떠오르는 성경이 10 문둥이 이야기다.

유대인은 문둥이가 특별한 죄 때문에 생기는 병으로 보았다.
하나님께 진노 받은 표시로 보기도 한다.
문둥이가 되면 동리에서 추방되고 가족들과 격리 되어 후미진 곳에서 살아야 했다.

열 명의 문둥이가 모여 무리를 이루고 있다.
자기네끼리 의지하며 신세를 한탄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마침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그 곳을 지나시게 되었다.
성한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던 문둥이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외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긍휼'이 여기소서!

이보다 더 간절하고 애절하며 절박한 외침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 불쌍히 보시사 모두를 낫게해 주신다.

그런데 보자, 그래 이럴 수 있나 !
천형의 문둥이가 나았는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하는 문둥이가 한 명 뿐이다.
그것도 이방 사마리아인 단 한 명이다.

감사에 얼마나 '인색' 한지!
감사하는 이가 겨우 9대 1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습일까?

신세 질때는 ‘은혜를 평생 잊지 않으리라’ 말은 하면서 은혜를 기억하고 갚는 이가 흔치 않은게 현실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물으신다.
아홉은 어디 있나 ...

그동안 우리는 아홉 문둥이를 쉽게 비난해 왔다.
그런데 요즘 그 아홉은 우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둥병 보다 더 중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살아 오다가 추수감사절이라고 그것도 인색한 마음으로 물질 몆푼 드리고 '감사했네... ' 하고 자만한다면 9 문둥이와 무엇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