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언론기관에서 대선주자들이 국민들과의 소통을 외치면서 정작 국민들과의 소통 통로인 기자들과는 바늘구멍 소통을 한다며 지적하는 기사를 읽어 보았다. 리더의 입장에서 소통을 한다고 해도 쉽지만은 않은 일임이 틀림없다. 기자들도 나름, 발빠르게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자기와 얘기가 안되면 “바늘구멍 소통”이라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소통이 잘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요즘 이상할 정도로 소통이 핫이슈이다. TV, 라디오 등 전통적 미디어 매체를 위시해서 SNS, 이메일, 인터넷 등 가장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시대에 ‘소통이 불통’이니, ‘바늘구멍 소통’이니 하는 목메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이러니다.
대학생들 중 페이스북을 하는 수를 조사했는데, 93%나 됐다. 이 통계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위 자스민 혁명이라 부르는 아랍 세계의 움직임도 이런 SNS 소통 체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가장 소통체제가 활발한 시대에 왜 우리는 계속 소통을 외치고 있는 것일까? 뭔가 뚫리지 않은 듯 답답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서너시간 이야기 해도 통하지 않는 답답함 때문이다.
각자의 어젠다만 있을 뿐, 서로를 향해 열려있는 귀가 없어서 일방통행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소통의 관건은 이해이다. 이해가 안 되면 백날 이야기해도 제자리이다. 이해의 핵심은 겸손이다. 상대방의 위치에 내려가 앉는 겸손이다. 겸손은 교육으로 습득되는 품성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날 때 주어지는 초자연, 초교육, 초상식, 초인간적 선물이다. 소통이 안된다고 느낄 때, 답답해서 어쩔 줄 모를 때, 딱 한 가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을 계속 묵상하는 일이다. 그러면, 바늘구멍으로 낙타라도 충분히 통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