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에 관한 칼빈의 정의는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여기에서 로마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반영하는 구원론적 문맥에서 예정론을 전개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이중예정으로 정의하였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이 목적들 중의 어느 한 쪽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칼빈은 이러한 예정론을 주장했다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에게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교리로서, 어거스틴뿐만 아니라 안셀름, 아퀴나스, 스코투스, 위클리프, 루터, 부처 등에게서도 나타나는 예정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칼빈은 예정론을 전개함에 있어 논리적 순서보다는 인식적 순서를 따랐다. 그의 예정론이 사색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정황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개 범위는 성경 안에서라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신앙으로 인식되는 예정

복음에 초청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또한 복음을 듣도록 초청받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응답하여 구원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응답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칼빈은 설교되고 안 되는 다양성, 그리고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의 다양성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다양성을 예정론과 연관시켰다.

“사실상, 생명의 계약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동등하게 전파되지 않고, 그것이 전파된 자들 중에서 계속해서 혹은 똑같은 정도로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놀랄 만큼 깊다는 것이 알려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다양성이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칼빈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경험과 신앙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고 믿게 된 것이지만, 인식의 순서는 그 논리적 순서와 정반대이다.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고 구원받게 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이다. 복음을 듣고 응답한 믿음의 원인은 선택인 것이다. 믿음 안에서는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예정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공평하신 하나님이 예정으로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기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칼빈은 예정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고 대답한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그리스도가 선택의 근거임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선택하신 후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정하셨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원 전에 정하신 자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그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선택의 대상인 인간 속에 선택의 어떠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칼빈은 “창세전에” 선택되었다고(엡 1:4) 말함으로써, 선택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어떤 고려도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또한 선택의 확실성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택자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선택되었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신앙 안에서 인식될 수 있다. 이 점이 칼빈의 예정론에서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예정론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면 불평이 아니라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은 예정하실 때,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조건을 보고 하신 게 아니다.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하나님의 뜻은 예정의 궁극적인 이유이다. 자신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예정이 무조건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감격하게 된다. 자신의 공로를 조건으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비를 생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이 볼 때,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고 하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일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뒤집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공로는 대조된다. 야곱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선택되어 유기된 에서와 구별되었지만, 공로에서는 에서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며 측은히 여길 자를 측은히 여기리라”고 하신 것(롬 9:15)이 그 이유이다.

성경적인 예정론

또한 칼빈은 예정론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칼빈은 우리가 예정론의 성경적 성격을 안다면 예정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은 선택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가 절대적 우선권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신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택에 의존한다는 것도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칼빈은 예정론이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쳤고, 사색과 이론화를 피하여 그 교리의 유쾌한 열매들이 음미되도록 했다. 칼빈에게 예정론은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며 위로의 교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선택을 실증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신앙과 함께 우리는 또한 거룩하게 된다”(살후 2:13)는 말씀처럼, 신앙과 거룩은 하나의 원천에서 흐르는 두 지류처럼 영원한 선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칼빈처럼 인식론적인 순서로 예정론을 성경범위 안에서 이해하면 거기에서 확신과 위로를 얻으며, 선택의 목적인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종희(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