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응답에는 ‘그래’와 ‘안 돼’ 그리고 ‘기다려’ (Yes/No/Wait)라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 응답이 Yes(그래)로 나오면 우리는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나 응답이 No(안 돼)로 나오면 실망합니다. Wait(기다려)의 경우는 No(안 돼)와 분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기다리라는’ 이 기도 제목에 대해 하나님이 No(안 돼)를 하신 것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지 잘 모릅니다. 잘못된 기도는 있으나 응답이 없는 기도는 없습니다.
바른 기도는 이미 그 기도 속에 응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바를 거절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친근하게 지냈던 나사로가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SOS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되어 이런 상황에 던져졌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의 열쇠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쇠만 가지고 있다면 조금 더디더라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소위 고통이나 불행을 겪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어찌해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질병과 죽음이 온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사로 인생의 현실에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질병과 죽음을 만나거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병이나 죽음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지속된다면 다릅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거나 인내하지 못할 상황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음에도 수많은 고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생명의 위험과 더불어 동족인 유대인들의 참소와 살해 위협을 당했습니다. 수 차례 감옥에서 여러 시련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이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확신이었습니다. 고통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다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어떤 섭리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1장 4절의 말씀 선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나사로가 결국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치유보다 더 좋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음이 인생의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이 지연되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숨겨져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더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궁극적으로 선하신 섭리를 믿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 열쇠밖에 없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그 가정에 도착하신 예수님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시기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즉 부활의 섭리를 아셨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2절에서 우리는 확신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삶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어도 만일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런 감사의 기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도란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는 이미 그 기도 속에 응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바를 거절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친근하게 지냈던 나사로가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SOS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되어 이런 상황에 던져졌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의 열쇠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쇠만 가지고 있다면 조금 더디더라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소위 고통이나 불행을 겪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어찌해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질병과 죽음이 온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사로 인생의 현실에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질병과 죽음을 만나거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병이나 죽음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지속된다면 다릅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거나 인내하지 못할 상황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음에도 수많은 고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생명의 위험과 더불어 동족인 유대인들의 참소와 살해 위협을 당했습니다. 수 차례 감옥에서 여러 시련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이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확신이었습니다. 고통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다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어떤 섭리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통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1장 4절의 말씀 선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나사로가 결국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치유보다 더 좋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음이 인생의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이 지연되더라도 믿어야 합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숨겨져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더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궁극적으로 선하신 섭리를 믿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 열쇠밖에 없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그 가정에 도착하신 예수님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시기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즉 부활의 섭리를 아셨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2절에서 우리는 확신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삶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어도 만일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런 감사의 기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도란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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