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부활 논쟁(IVP)>은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가?’를 놓고 당대 최고의 무신론자였던 영국의 앤터니 플루(Antony Flew·1923-2004)와 부활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인 미국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1950-) 사이의 공개토론을 지상 중계한다.

둘은 지난 1985년과 2000년, 2003년 세 차례나 부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책 1부는 마지막 논쟁인 2003년 1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열린 베리타스포럼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플루의 주요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부활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들은 다른 종교들이 주장하는 기적들보다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믿는 교인이라면, 부활에 대한 믿음 역시 합리적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확실한 사건으로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이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다른 모든 것들과 너무나도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의 살과 피를 제자들이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이처럼 부활은 이 세상에서 경험해본 것들과 너무나 달라서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플루는 그러면서 성경 이외에 당대 많은 문헌들을 증거로 채택해 볼 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 사건 후 예수가 실제로 죽었는지, 장사지낸 증거가 있는지,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이유와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밝힌다. 부활 후 많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현’에 대해서도 믿기 힘들다는 반응과 함께 ‘집단 환영 목격’ 가능성도 제기한다.

하버마스는 여기에 차분하고도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죽지 않을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음을 의학적으로 논증하면서, 이를 조작하려 했다면 당시 법정에서 증언의 효력조차 발생할 수 없었던 ‘여인들’의 증언에 기대어 부활을 주장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도 여기에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낙심하여 제각기 뿔뿔히 흩어져버린 제자들이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언자가 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플루도 인정하듯,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 대해 반대하거나 그들을 핍박했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바울의 존재가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예수는 공생애 중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며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했고, 이는 실제로 이뤄졌다.

2부는 플루가 유신론으로 입장을 바꾼 과정에 대해 다룬다. 그는 1부의 마지막 토론 이후 하버마스에게 “유신론자가 되는 것을 고려중”이며, “자신은 아직 무신론자이지만 무신론에는 몇 가지 커다란 의문점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1년 후인 2004년 1월, 그는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의 특별 계시 개념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유신론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사후 세계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았고, ‘악의 문제’ 때문에 유신론에서 기독교로까지 움직이는 것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야기했다. “성경은 기독교의 진실성 여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마치 최고 소설가의 작품을 읽듯 읽을 수 있는,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 예수님은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에 비해 대단히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는 <존재하는 신(청림출판)>을 통해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의 ‘순례’ 과정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2-3부에서 주로 설명하고 있다. 데이비드 바게트는 부활의 의의와 함께 둘의 대화를 검토한다. 플루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미 여러 번 말했다시피, 그 어떤 종교도 예수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과 바울과 같은 최고 수준의 지성을 결합하고 있지 않다. 만일 전능한 신이 종교를 세웠다면 기독교가 바로 그 종교일 것이다! … 전능한 신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 나는 이렇게 말하는 음성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뜨겁고 날카롭게 부딪치는 서로의 논리만큼 돋보이는 것은 플루와 하버마스의 ‘우정’이다. 둘은 시종일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실수나 잘못을 수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플루는 자신이 유신론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하버마스에게 가장 먼저 밝힐 수 있었다. 이는 안티기독교에 대응하면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태도 중 하나다.

‘유신론으로 회심’한 후이긴 하지만, 플루의 다음 발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를 비과학적이라 부정하거나, 진화론을 내밀며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새겨볼 만하다. 물론,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해 내겠다’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조언이다.

“나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내가 과학 저널의 어떤 논문을 읽지 않았고 자연발생론과 관련된 최신 논의들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점을 의기양양하게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이 수준의 사고는 철학자로서의 사고이다. 건방지게 들릴 위험이 있더라도 이 말은 반드시 해야겠다. 이것은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지 과학자들이 과학자로서 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