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신학을 공부하며 양화진 선교사 묘지를 방문해서 기도하며 소명을 불태웠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다니던 학교에서 멀지 않아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을 찾아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던 순교자들의 이름 석자를 되 뇌이며, “부족한 종도 가신 길 따라가게 하옵소서” 기도하던 때가 아련합니다. 한 번은 여수에 집회로 내려갔다가 손양원 목사님의 손길이 묻어있던 애양원을 방문하여 그분의 삶과 사역을 보며 눈물 펑펑 흘렸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나의 모습이 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생명조차 아끼지 않으셨던 믿음의 선배들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지조와 절개는 국가적인 재난이나 엄청난 위기의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 생활 속에 나타내야 할 주님의 부탁이고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룩에 감염된 반죽 같아져 버린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때는 좀더 잘 믿기 위해 남들과 다르게 살아보겠노라 시작했는데, 결국은 ‘회 칠한 무덤 같은 자들, 남을 넘어지게 하는 평토장 같은 자들’이라는 욕만 잔뜩 듣고,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 버리고 만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요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를 때 “교회 다니는 분들…” 이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것들?”, “교회 다닌다는 것들이 다 그렇지”라고 평가해 버리고 맙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이리 되었을까 따질 마음은 없습니다. 목사건, 장로건, 권사건, 평신도건 우리가 믿노라 입으로만 떠들고, 지켜야 할 진정한 ‘신앙의 절개’는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향해 우리 주님이 뭐라 하실까 생각해봅니다. “위선 떨지 말고, 신앙의 절개 좀 지키고 살아봐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지마… 세상 것들로 두려워하지도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아라. 너의 머리카락 수까지 다 알 정도로 내가 널 살펴보고 있지 않느냐?”(눅12)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드는 작은 것에서부터 ‘절개’를 지켜 봅시다. 사람 앞에, 돈 앞에, 명예 앞에, 취미 앞에, 자식 앞에 그저 힘없이 신앙이고, 예수님이고 포기하고 적당히 ‘신앙인’인척 하며 살지 말고 말입니다.

주님이 오죽하시면 “내가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팔랑개비’ 같은 시대 ‘절개(Eternal constancy)’라는 단어가 자꾸 가슴을 파고 들어옵니다. @ kisung
Jun 3.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