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저지대국가들이 합스부르그家인 스페인 필립왕에게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오렌지 공 윌리엄 휘하의 시민군과 베거라 불리우던 독립군들의 항쟁 말기에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로크풍의 화가중의 하나로서 중세의 모든 화가들이 그러했듯 강력한 종교적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 대부분은 성서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유복한 제분업자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없는 유년생활을 보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돈독한 여인으로 성서를 읽는 진지한 모습이 아들의 그림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렘브란트의 신심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2천여 점이나 되는데 그의 그림 대부분이 암스텔담의 국립미술관이나 그의 집을 개조해 만든 렘브란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십년전 그의 그림앞에 섰던 때의 감동이 아직도 마음의 영상으로 남아있음은 그의 그림의 명암이 너무도 강력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빛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초상화를 그림에 있어 사실을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의뢰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자화상을 처음 접한 괴테는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는 생명이 없는 시신과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고 한다.
그의 말년은 아내가 죽자 처가로부터의 재산유용문제로 고발을 받는등 1656년에는 파산까지해 유대인 지역에서 가난에 시달리다가 1669년 암스텔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말년은 화구와 몇 벌의 옷만이 재산으로 남았을 만큼 지극히 초라한 것이었는데. 그의 그림이 강력한 명암의 구도로 빛과 그림자가 분명했던 것처럼 그의 생애야 말로 명암으로 굴곡진 생애였던 것이다.
루벤스는 벨기에 화가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루벤스를 독일태생이라 하지만 당시는 국가개념이나 국경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태어난 고향은 저지대 국가중 롤랑드지역과 독일북부지역이 겹치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렘브란트가 화란에서만 회화작업을 했다면 그는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 역시 종교적인 주제가 많았다. 왜냐하면 교회로부터 주문제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루벤스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당시 유럽의 집권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으며 스페인의 펠립 4세나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캘빈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였으나 그는 가톨릭학교를 다녔던 연고로 반종교 개혁 형식의 그림을 즐겨 그렸고 따라서 성당화를 많이 그렸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저택은 그대로 루벤스 미술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렘브렌트가 개혁주의 교회의 전령사로 종교개혁적 그림을 많이 그렸다면 루벤스는 반 종교개혁적인 그림으로 케톨릭교회를 위해 그림을 그린 인물로, 17세기의 대비되는 최고의 화가들로서 평가된다. 부모의 신앙교육은 한 사람은 개혁주의적 화가로 또 한 사람은 반 종교개혁적 화가로 역사에 각인되게 한 것이다. 가정의 달에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2천여 점이나 되는데 그의 그림 대부분이 암스텔담의 국립미술관이나 그의 집을 개조해 만든 렘브란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십년전 그의 그림앞에 섰던 때의 감동이 아직도 마음의 영상으로 남아있음은 그의 그림의 명암이 너무도 강력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빛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초상화를 그림에 있어 사실을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의뢰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자화상을 처음 접한 괴테는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는 생명이 없는 시신과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고 한다.
그의 말년은 아내가 죽자 처가로부터의 재산유용문제로 고발을 받는등 1656년에는 파산까지해 유대인 지역에서 가난에 시달리다가 1669년 암스텔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말년은 화구와 몇 벌의 옷만이 재산으로 남았을 만큼 지극히 초라한 것이었는데. 그의 그림이 강력한 명암의 구도로 빛과 그림자가 분명했던 것처럼 그의 생애야 말로 명암으로 굴곡진 생애였던 것이다.
루벤스는 벨기에 화가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루벤스를 독일태생이라 하지만 당시는 국가개념이나 국경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태어난 고향은 저지대 국가중 롤랑드지역과 독일북부지역이 겹치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렘브란트가 화란에서만 회화작업을 했다면 그는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 역시 종교적인 주제가 많았다. 왜냐하면 교회로부터 주문제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루벤스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당시 유럽의 집권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으며 스페인의 펠립 4세나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캘빈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였으나 그는 가톨릭학교를 다녔던 연고로 반종교 개혁 형식의 그림을 즐겨 그렸고 따라서 성당화를 많이 그렸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저택은 그대로 루벤스 미술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렘브렌트가 개혁주의 교회의 전령사로 종교개혁적 그림을 많이 그렸다면 루벤스는 반 종교개혁적인 그림으로 케톨릭교회를 위해 그림을 그린 인물로, 17세기의 대비되는 최고의 화가들로서 평가된다. 부모의 신앙교육은 한 사람은 개혁주의적 화가로 또 한 사람은 반 종교개혁적 화가로 역사에 각인되게 한 것이다. 가정의 달에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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